어두컴컴한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방 한구석엔 이불이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다. 박 화백은 등에 진 벽송을 방 안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경내로 걸어 나왔다. 해봉처사뿐 아니라 스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어린 동자승의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다.

박 화백은 법당으로 가서 문을 열어 보았다. 텅 빈 법당 안에는 향불이 피어 오르고 있었고 금동불상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박 화백은 다시 암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도무지 사람들의 기척이 없고 암자는 텅 비어 있는 것만 같았다. 박 화백은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꼬나물었다.

도대체 어디로들 갔단 말인가. 암자를 비워 두고 모두 탁발이라도 떠났단 말인가…….

그때 어디선가 ‘타닥 타닥’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가 나는 곳은 법당 뒷길 산으로 올라가는 방향이었다. 박 화백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소리 나는 쪽으로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암자 뒷길로 해서 조금 걸어가니 산길로 접어드는 부근에 꽤 큰 공터가 보인다.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눈앞에 나타난다. 젊은 스님과 동자승이었다.

스님은 장작을 쌓고 있었고 동자승은 옆에서 스님이 하는 거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타닥 타닥’ 하는 소리는 스님이 장작을 쟁이는 소리였다.

「스님!」

스님이 돌아본다.

「이 늦은 밤에 뭐하십니까?」

스님은 대꾸가 없다.

「해봉처사님께선 어디 출타중이신가요?」

「그분은 이제 안 계십니다.」

스님의 말에 박 화백의 가슴이 철렁한다.

「왜요? 이 암자를 떠나셨나요?」

「그렇습니다. 먼 곳으로 가셨습니다.」

「먼 곳으로……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생전에 선업(善業)을 많이 지어서 좋은 곳으로 갔을 겝니다.」

생전이라니. 박 화백이 멍해진다.  그제서야 가만히 살펴보니 스님이 장작을 쌓아 올린 나뭇단 위에는 송목(松木)으로 만든 관이 놓여 있었다. 관 속에는 흰 천으로 둘둘 만, 얼핏 보아 죽은 사람의 시신이 틀림없어 보이는 물체가 보였다.

그렇다면 해봉처사께서…….

장작을 쌓아 올리는 것으로 보아 다비를 할 모양이었다.

박 화백은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이렇게 되면 벽송의 마지막 생존자인 해봉처사 최해수 선생마저 마침내 열반에 들었고, 이제 벽송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이틀 전에 입적하셨지요.」

「고령이시긴 하나 건강했잖습니까?」

「원래 높으신 분들은 그렇게 떠나시곤 한답니다.」

「…….」

「어쨌거나 잘 오셨습니다. 시주께서 오셔서 이 추운 겨울 처사님 가시는 길이 덜 외롭겠습니다.」

동자승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 보고, 스님은 장작을 계속 간추려 해봉처사의 다비를 준비한다. 얼굴만 내놓고 흰 천에 싸인 해봉처사의 시신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은 죽은 지 이틀이 지났건만 흡사 동안의 소년처럼 꿈을 꾸듯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영혼이 맑은 사람이 죽으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더니…….

박 화백은 해봉처사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벽송을 놓아  둔 그의 방으로 돌아왔다.

해봉처사에게 벽송을 맡기고 자신은 벽송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박 화백의 의중은 해봉처사의 죽음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어쩐단 말인가…… 이 벽송을 어찌한단 말인가…….

고뇌에 젖어 있는 박 화백의 시선에 서안 위에 놓인, 해봉처사가 생전에 지니고 있던 염주가 들어왔다. 박 화백은 해봉처사의 염주를 무심코 손으로 집어 들었다.

딸그락.

방바닥에 뭔가가 떨어졌다. 가락지였다. 염주 사이에 끼여 있던 가락지는 황판수가 추동삼에게, 그리고 추동삼이 죽자 해봉처사가 간직하고 있던 승부의 영험과 고향의 의미를 지닌 승부사들의 유품이었다.

박 화백은 가락지를 집어 들었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구식 금가락지였다. 박 화백은 가락지를 유심히 바라본다…….

결국 그런 것인가, 태어남 그 자체가 승부이고 인간은 그 승부의 땅에서 살다가 죽어서야 승부의 강을 건너 피안(彼岸)으로 가는 것인가…….

박 화백은 가락지를 품속에 넣으려다 말고 해봉처사의 염주 밑에 다시 놓아 두었다.

밤이 깊어 산문 밖에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달포 전, 이곳에서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자신에게 그 긴 이야기를 들려 주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분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생사의 이치가 불변이라 하나 가슴 밑바닥에서 비애 같은 것이 자꾸 치밀어 올라온다.

방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차갑게 방 안으로 밀려든다. 박 화백은 벽송을 둘러싼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를 풀자 삼베보로 덮은 벽송이 나타난다. 벽송 위로 한기가 스며든다. 박 화백은 추위도 잊은 채 벽송을 무심히 지켜본다.

결국 모두가 죽었다. 이 벽송에 얽힌 숱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심오하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 하나 사람의 일생 그 과정이 너무 오묘하다. 저 벽송을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인연들은 또 어디로 흩어졌단 말인가.

혜안과 망상이 마주치고 적요와 혼란이 뒤섞인다. 멀리 산 속에서 불여귀조(不如歸鳥)의 애끊는 울음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