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암을 떠나 서울로 온 지 어언 달포 가량이 지났다.

서울에 와서 박 화백은 외부와의 연락을 두절한 채 두문불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마음이 답답할 땐 간혹 집 근처 도봉산에 올라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걸어서 15분 가까이에 있는 산은 겨울철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고 여름 한철 장사를 하던 산 아래 식당들도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다.

박 화백은 동네 가게에 들러 막걸리를 몇 통 구입한 후 터벅터벅 산을 향해 걸어간다.

산 입구에 도착해서 2, 30분간 산 위로 올라가면 바람이 드세어지고 비록 대도시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산이긴 하나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늘한 기운이 몸에 와 닿는다.

박 화백은 적막한 산길에 걸터앉아 사 가지고 온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한다.

한 잔, 두 잔…….

점차 술기운이 달아오르고 어느새 해가 떨어진다. 해가 지는 산 아래를 굽어보면 그럴 때마다 박 화백의 머리 속에는 어김없이 얼굴들이 나타난다.

여목, 설숙, 평사, 동삼…….

박 화백은 그들을 떠올리며 심한 상실감에 빠진다.

혹시 나는 주위의 찬사와 상혼에 연류된 사람들의 부추김으로 진정 지켜 나가야 할 것을 망각한 채 살아온 것은 아닐까. 화려한 명성으로 채색된 몰가치한 껍데기를 예술이란 미명하에 허울 좋은 포장으로 굳게 봉인하고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길을 외면해 왔던 건 아닐까. 그리하여 내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자신의 예술세계마저 오도하며 살아온 게 아닐까.

박 화백은 고통스럽다. 그들이 갈구했던 삶과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삶은 근본적으로 달랐고, 그들의 치열했던 삶을 생각하면 박 화백은 한없이 자신이 왜소해짐을 느낀다.

보름 전, 전에 나가던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신학기부터 다시 나와 강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박 화백은 그러마 하고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난 여름에 준비했던 개인전은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

쉬고 싶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벽송이었다. 해봉처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박 화백은 벽송의 처리 문제를 놓고 그날부터 지난 달포 동안 매일 밤, 잠 한숨 이루지 못하고 고민을 했다.

정 국수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벽송의 진정한 주인으로 추동삼씨를 인정했고 해봉처사는 그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난 후 벽송에 대해선 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다. 사실 박 화백은 해봉처사가 벽송에 대해 어떤 말이든 해 온다면 그의 뜻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봉처사는 결코 벽송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박 화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불관언 입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박 화백은 해봉처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결국 그 역시 한 치도 벽송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벽송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뜻을 표출하면 그 순간 그도 벽송이라는 거대한 굴레에 갇혀 버릴 것이었다.

평생을 마음 한구석에서 자신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았던 번뇌의 고리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혀 왔던 것이다. 긴 세월 부처님 곁에서 살았건만, 칠순이 넘어 도인의 풍모를 갖춘 그였지만 벽송 앞에서는 그도 한갓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난감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벽송의 문제는 어찌해 볼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벽송을 자신의 집에 그대로 둘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 화백은 서재로 간다.

서재 한가운데 삼베보에 덮인 벽송이 있다. 박 화백이 다가가서 삼베보를 벗긴다. 명반 벽송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 화백은 다시 깊은 고뇌에 빠진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반(盤)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정 국수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 당부를  자신에게 하였는지…….

설령 정 국수 자신이 벽송을 끝까지 간직했다손 치더라도 정 국수 역시 벽송의 처리가 고통스러웠으리라. 벽송으로 인한 추동삼씨와의 갈등은 차치하고라도 마땅히 대를 이어 벽송을 물려줄 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과연 어떤 당대의 기객이 있어 이 천하의 명반 벽송을 물려받겠는가.

박 화백은 정신을 가다듬고 보다 현실적으로 벽송의 문제에 접근한다. 현실적으로 처리한다면 전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쉽게 생각해서 박물관이나 한일기원에 맡겨 버리면 간단했다. 박물관에 보관하여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벽송의 위대함을 설파하든지 한일기원에 맡겨 많은 바둑인들에게 벽송의 뜻을 길이길이 되새기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것도 나름대로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 화백의 생각으로는 박물관이나 한일기원은 왠지 벽송이 가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벽송이 가기에는 이미 그곳은 너무 세속화되어 있었고 벽송이 박물관이나 한일기원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박 화백은 벽송을 앞에 놓고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느 틈에 벽송의 반면 위에 달빛이 내려와 은은히 부서진다.

며칠 후 이른 새벽.

박 화백은 생각다 못해 벽송을 차에 싣고 해봉처사가 있는 함백산 수로암으로 향했다.

결국 박 화백이 최후로 내린 결론은 해봉처사였다. 생각해 보면 벽송과 인연의 끈을 잡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는 해봉처사밖에 없었다. 설숙의 장제자인 해봉처사 최해수야말로 어쨌거나 벽송의 거처를 책임 질 수 있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가 벽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간에 박 화백은 벽송의 처리를 해봉처사에게 맡길 요량이었다.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는 벽송을 일단 그에게 넘기는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가 산 아래 장암사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박 화백은 곧바로 벽송을 등에 지고 수로암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한겨울이었으나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몇 번씩이나 쉬어 가야 할 만큼 힘든 산행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박 화백이 겨우 수로암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하루해가 저물고 날은 어두워졌다.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급한 마음에 벽송을 등에 진 채 박 화백은 암자에 들어섰다.

암자는 조용했다. 어두워졌다고는 하나 아직 잠자리에 들기엔 이른 시간이련만 방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박화백은 해봉처사가 있는 맨 끝방으로 다가갔다.

「처사님.」

기척이 없다.

「처사님.」

「…….」

박 화백이 소리를 죽여 방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