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연회장은 밀려드는 축하객으로 부산스러웠다. 정 국수는 호텔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하객들은 한결같이 정 국수를 찾아가 악수를 청하며 그의 업적을 치하했다.

「정말 축하 드립니다. 큰일을 해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정 국수는 정중한 자세로 일일이 손님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신의 국수전 10연패의 위업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 정 국수 앞에 동삼이 나타났다. 동삼을 본 정 국수는 깜짝 놀랐다.

「옛 친구가 출세를 했는데 내 술 한잔 안 얻어먹을 수 있나.」

동삼이 정 국수의 손을 잡았다.

「잘 왔네. 들어가시게.」

정 국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화사한 한복 차림의 여자에게 동삼의 안내를 부탁했다.

동삼은 홀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 안은 무지개를 잘게 부숴 놓은 듯한 샹들리에 불빛으로 휘황찬란했다. 넓은 연회장이 꽉 찰 정도로 하객들이 북적거렸고, 홀 전면 한 중간엔 ‘축 정명운, 국수 10기 연패’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축하객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정장 차림이거나 단정한 한복 차림이었다. 동삼의 남루한 옷차림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방인처럼 보였다. 동삼은 개의치 않고 태평스럽게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홀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오늘 정명운 국수의 국수전 10연패 축하연에 참석한 여러 귀빈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곧 이어 전문기사님들이 참가하는 기념대국이 시작되겠습니다.」

홀 한가운데에 미리 준비된 바둑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원로기사를 선두로 양쪽에서 한 사람이 한 수씩 놓고 돌아가는 릴레이식 바둑이 시작되었다.

바둑이 한창 진행중일 때 정 국수가 동삼에게 다가와 술을 한 잔 권했다. 동삼이 정국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10연패라…… 영원히 명예국수로 남는다며? 그래 역사에 남을 국수가 된 기분이 어떤가?」

정 국수가 얼굴을 붉혔다.

「놀리지 말게. 자네는 그 동안 무얼 하며 지냈나.」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사회를 보던 사람이 정 국수에게 다가왔다.

「정 국수님, 한 수 놓으시죠.」

정 국수가 잠시 머뭇거렸다.

「추 사범이 한 수 놓지.」

「나 같은 사람이 자격이 있나.」

「자넨 떠돌이 국수가 아닌가.」

거듭된 정 국수의 권고에 동삼은 마지못해 바둑판 앞으로 나갔다. 동삼은 묵묵히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중반전 가까이 진행된 바둑이었다. 동삼은 가만히 바둑판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동삼을 지켜 보았다. 축하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가, 그것도 정 국수의 간곡한 권유를 받고 자리에 오르자 미상불 그의 착수가 궁금했다.

정 국수는 그런 동삼의 모습이 뜻밖이었다. 평소 거의 말이 없고 예전 같으면 이런 자리에 나올 리도 없는 동삼이었다. 자신이 청한다고 앞으로 나설 동삼은 더욱 아니었다. 확실히 동삼은 변해 있었다. 보다 넓고 보다 유연하게 변해 있었다.

정 국수는 동삼을 보며 묘한 상실감을 느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찬사가 왠지 덧없이 생각되기도 한다. 메마른 바람이 부는 언덕, 그 언덕에서 바라보는 능선은 아득하기만 하다. 정 국수는 막연한 심정으로 동삼을 쳐다본다.

바둑판 앞에서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던 동삼이 돌을 들어 한 수 착수했다. 정 국수는 어떤 수인가 싶어 반상을 보았다. 평범하게 중앙으로 한 칸 뛴 수였다. 너무나 평범해서 무어라 평할 수 없는 착점이었다. 그렇다고 전혀 나무랄 수도 없는 한 수였다.

「평상(平常)이 곧 도(道)이다.」

정 국수는 불현듯이 조주(趙州)선사의 스승 남천(南泉)승의 말이 떠올랐다.

동삼이 나갈 때 정 국수는 입구까지 전송했다.

「잘 가시게.」

정 국수가 마지막으로 본 동삼의 모습은 평온했다.

그들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동삼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때로는 눈에 띄는 아무 기원에나  올라가 하급자들이 두는 바둑을 진지하게 구경하기도 했으며, 바둑을 청해 오는 사람은 누구든 마다 않고 다 상대해 주었다. 동삼이 예전에 천하제일의 기객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최대포는 청량리 부근의 한 변두리 기원에서 오갈 데 없는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옥화 말일세.」

인적이 끊긴 거리는 가로등 불빛만이 훤하다. 잎이 다 떨어진 가로수 나무가 앙상하다.

「신세가 가련하게 됐더군. 자네가 준 돈으로 큰 식당을 했었는데 살 만하자 젊은 여자와 눈이 맞은 남편이 그걸 팔아 치우고 잠적해 버렸다네. 무슨 그런 팔자가 다 있는지…… 다시 대폿집을 차렸다네.」

최대포의 얼굴이 많이 늙었다.

「이따금씩 들르면 자네 소식을 묻더군.」

동삼이 최대포의 잔에 술을 따라 준다.

「불쌍한 여자.」

메마른 최대포의 손등에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피어 있다. 술잔을 든 최대포의 손이 조금씩 떨린다.

「바둑은 한번씩 두나?」

「예.」

「그 바닥도 이젠 많이 변했지?」

「…….」

「자네도 늙어 가는군. 이마에 주름이 보여…….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마포에 있던 동명관이었던가……. 자넨 바둑은 잘 뒀지만 영락없는 신출내기 소년이었지……. 벌써 오래 되었어……. 덧없는 세월이었네…… 나 같은 사람 만나지 않았으면…… 그 실력이면 잘될 수 있었을 텐데…….」

최대포는 소주를 병째 나발을 불었다. 부스스한 백발,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무대 조명처럼 난로 주위를 밝힌 형광등 불빛 아래 최대포의 지난 삶이 내려앉아 있었다.

술에 취한 최대포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난롯가에서 잠이 들었다. 동삼은 그의 옆에 앉아 잠든 최대포를 지켜 본다.

모든 것이 꿈 같다. 그와 만나고 헤어졌던 지난 세월이 한바탕 꿈같이 느껴졌다.

동삼은 최대포가 부어 놓은 술잔을 천천히 들었다.

아침 일찍 최대포가 눈을 떴을 때 동삼의 모습은 없었고 빈 소주병 옆에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해봉처사의 말에 동삼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오셨나?」

「…….」

해봉처사가 녹차를 달여 동삼 앞에 내놓는다.

「사는 건 어떤가?」

「늘 그렇지요.」

「바둑은 계속 두시나?」

「그런 셈이지요.」

「여전히 돌아다니고?」

「예.」

「운수객이군.」

「옛날 생각 안 나오?」

「바둑 두는 일이나 부처님 모시는 일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산이 너무 편하고 좋아.」

「…….」

「자네도 그만 떠돌아다니고 여기 있게.」

「절에서 아무나 받아 줍니까?」

「부처가 사람 가리는 거 봤나.」

해봉처사와 동삼은 같이 웃었다.

「황판수란 친구가 있습니다.」

「황판수?」

「몹쓸 병을 얻어 소록도에 있는데 근방을 지나는 일이 있으면 들러 주십시오.」

「알겠네.」

「가겠습니다.」

「바둑이나 한 수 배워 주고 쉬어 가지.」

「또 오겠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동삼은 산자락에 핀 진달래꽃을 본다. 꽃이 하늘하늘 바람에 흔들린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듣던 정원의 슬픈 새소리.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머니 모습은 꼭 진달래 꽃잎같이 화사했다. 봄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 아름답고 여린 꽃이…… 어머니가 되었다.

내려가는 동삼의 뒷모습을 해봉처사는 먼 발치에서 바라본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동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 봄기운이 파릇하게 내비친 산길을 메마른 바람이 스친다. 쓰르륵 쓰르륵 어디선가 산새소리가 들린다.

벌써 여러 차례 동삼은 그런 식으로 불쑥 찾아왔다가 표연히 사라지곤 했다. 때로는 열흘, 한 달씩 머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