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가는 한밤중에 성부영 집 담을 넘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살금살금 안방으로 다가간 곽가는 문 밖에서 방 안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성부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결심을 굳힌 곽은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봉창으로 스며 드는 달빛 아래 잠든 여인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소문으로만 듣고도 욕심이 생기던 여인, 곽의 욕정이 활활 타오른다. 달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절색이었다. 곽은 단참에 성부영을 덮쳤다.

곽은 기겁을 하며 깨어난 성부영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강제로 옷을 벗겼다. 희뿌염한 달빛 아래 보이는 추괴한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부영은 까무라칠 뻔하였다. 어떻게 하든 당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속절없이 그녀는 유린당하고 말았다.

곽가는 난생 처음 가져 보는 쾌감에 전율했다. 성부영은 얼굴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여자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 죽여 흐느끼는 성부영을 두고 곽은 만족스럽게 그 집을 나갔다.

곽은 그 후에도 심심찮게 성부영의 집 담을 넘었다. 갈수록 대담해져서 방에 불을 훤히 켜고 겁에 질린 성부영의 아리따운 얼굴을 즐겨 가며 겁탈했다.

이석범이 성부영을 다시 찾았을 때는 그녀가 이미 곽에게 여러 차례 욕을 보고 난 후였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성부영은 이석범을 피했다.

이석범은 자신을 피하는 성부영을 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황판수란 놈은 내가 알아서 처리를 했소.」

성부영이 반응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소?」

「…….」

성부영의 입술이 울먹인다. 불현듯이 이석범의 가슴이 쿵쾅거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보시오.」

한동안 입술만 꽉 깨물고 있던 성부영이 마지못해 말문을 연다.

「살아 있음이 구차스럽습니다.」

「무슨 뜻이오?」

「일행 중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일순 이석범의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진다. 곽의 얼굴에 그어진 칼자국이 눈앞을 휙 지나간다. 이석범은 가슴이 철렁한다.

「있긴 있소이다만…….」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말이 떨린다. 어금니를 질끈 깨문 성부영이,

「다, 남편 잃은 박복한 팔자 탓이겠지요.」

하면서 흐느낀다.

「그럼…… 그럼…….」

이석범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나가시오.」

성부영의 목소리에 결기가 서린다. 휘청이는 걸음으로 성부영의 집을 나온 이석범은 울면서 밤길을 걸었다. 친구의 여인이기에, 자신이 문둥이이기에 속마음을 한 오라기도 성부영에게 비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석범은 자기 몸을 제 손으로 갈갈이 찢어 버리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석범은 품속에 낫을 숨기고 곽을 불러 냈다.

「어이 곽, 나 좀 봐.」

「왜?」

「잠깐만 좀 따라와.」

이석범은 곽을 데리고 문둥이가 죽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버리는 숙소 부근 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무심코 따라오던 곽도 점점 긴장하는 눈치였다. 몸에서 도전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곽도 옛날에는 주먹깨나 쓰는 건달 출신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석범이 곽을 돌아봤다. 곽의 얼굴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이석범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내 친구 여자 집 담을 넘었나?」

「무슨 말이야?」

곽이 한 발 물러섰다. 이석범이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이 사람아. 어차피 그럴 거면 왜 혼자 갔어? 나도 부르지.」

달빛 아래 곽이 희미하게 웃었다. 얼굴의 칼자국도 따라 웃었다.

「어쩐지 자네는 꺼릴 것 같아서…….」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석범의 낫이 허공을 가르며 무자비하게 곽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두 번, 세 번 연이어 내리찍었다. 곽은 덤벼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무도 없는 죽음의 자리, 비명소리가 드세어도 누구 하나 달려올 사람이 없었다.

이석범은 미치광이처럼 계속 낫을 휘둘렀다. 곽의 몸뚱아리는 해질대로 해졌다. 걸레가 된 처참한 시신을 안고 이석범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윽고 낫을 던져 버린 이석범은 양 무릎에 머리를 박고 오랫동안 울었다.

문둥이의 아픔은 문둥이만이 안다. 이제 머잖아 성부영의 그 아름다운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질 것이다.

이석범의 가슴이 메인다.

한 번만…… 꼭 한 번만 더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리고 영원히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며칠 후 이석범은 성부영의 집을 다시 찾았다.

「곽가 그놈은 내가 죽였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오.」

성부영이 실색을 하며 이석범을 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성부영이 으스스 몸을 떤다. 이석범의 눈이 타오른다. 익숙한 눈빛이다. 오래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다. 척박함, 삭막함, 그리고 깊은 연민…… 그 밑바닥엔 정체 모를 설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허둥지둥 이석범의 눈길을 피하며 성부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석범을 외면한다. 미묘한 파문이 가슴에 차 오른다. 추악한 이석범의 얼굴이 어찌하여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제서야 간혹 마주친 이석범의 눈에 내비치던 그 쓸쓸함의 정체가 확실히 와 닿는다. 남편 김용택이 살아 있을 때도 그 사람의 눈빛은 항상 그랬었다.

「곽가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지만……. 사실 지나고 보니 황판수 그 사람에겐 몹쓸 짓을 했소.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앞뒤 없이 너무 격분하여…… 그 사람에겐 지나쳤소.」

이석범이 일어선다.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친다. 이석범의 눈에 물기가 묻어난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오.」

성부영의 눈이 파들파들 떨린다. 이석범이 작별을 고했다.

「잘 있으시오.」

돌아서 가는 이석범을 성부영은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 길로 사라진 이석범은 성부영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듬해 겨울, 성부영의 몸에서 서서히 나병 증상이 나타날 무렵, 그녀의 집 근처 논바닥에서 얼어 죽은 한 문둥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성부영은 늦은 밤을 틈타 망또를 뒤집어쓰고 그곳으로 갔다.

허허벌판에 버려진 시신은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성부영은 가만히 가마니를 들추었다.

이석범이었다.

엄동설한 바람은 살을 에이듯 차다. 얼어붙은 시신을 멍하니 바라본다. 차가운 바람이 성 여인의 온몸을 때린다.

곽을 죽이고 세상을 떠돌던 이석범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사랑했던 여인 성부영을 찾아온 것이었다.

성부영은 그 길로 나환자촌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 후 나환자 무리에 섞여 남으로 남으로 떠돌다가 그녀가 도착한 마지막 종착지는 유배의 섬 소록도였다. 거기서 그녀는 우연히 황판수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황판수는 동두천 내천리 나환자 촌을 비롯해 몇 군데를 전전하다 1년 전 소록도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