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팔진도(八陣圖)라고 들어 봤나?」

초성 스님이 동삼에게 물었다.

이감된 지 어언 몇 달이 흘렀다. 동삼과 스님은 그 동안 몇 마디 대화가 없었다. 말수가 적은 스님이 근 한 달 만에 동삼에게 끄집어낸 화제는 난데없이 팔진도였다.

「팔진도란 여덟 가지 모양으로 친 진법(陣法)을 말하네. 통상 천(天), 지(地), 풍(風), 운(雲), 용(龍), 호(虎), 조(鳥), 사(蛇)로 나타내나 병가에 따라선 그 형상을 달리하네. 제갈공명은 동당(洞當), 중황(中黃), 용등(龍騰), 조상(鳥翔), 연횡(連衡), 악기(握奇), 호익(虎翼), 절충(折衝)이라 했으며, 손자(孫子)는 방(方), 원(圓), 빈(牝), 모(牡), 충방(衝方), 부저(不佇), 거륜(車輪), 안항(雁行)이라 했고 오자(吳子)는 거상(車箱), 거륜(車輪), 곡진(曲陣) 등으로 썼네.」

잠시 말을 끊고 스님은 그윽한 시선으로 동삼을 응시했다. 스님은 바둑판 위에 기묘한 형태로 돌들을 늘어놓았다.

「이것이 공명 선생의 동당의 원 형태일세.」

연이어 스님은 또 한 형태의 그림을 바둑판 위에 늘어놓았다.

「이것이 중황이로세.」

스님은 계속 제갈공명의 팔진도를 동삼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이 절충으로 팔진도의 마지막 형태이네.」

「…….」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공명의 팔진도는 상당 부분 훼손되거나 변질되어 내려왔네. 하지만 최소한 이것은 거의 원형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아니 원형 그 자체일 것이야.」

동삼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난해한 팔진도를 내려다보았다.

「팔진도는 우주가 녹아 있고 자연이 스며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내포되어 있지. 가히 천지음양의 이치가 이 속에 숨쉬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거네.」

「…….」

「나는 바둑을 잘 몰라. 하지만 문득 자네의 바둑 수련에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일러 주는 거야. 우연히 떠오른 사념이니 너무 매이지는 말게.」

동삼은 모호한 시선으로 팔진도를 내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슨 괴물을 마주하여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스님이 팔진도를 거두었다.

「내 오늘 자네에게 어떤 돌중의 이야기를 들려 주지.」

「…….」

「한 스님이 있었네. 말하자면 선승이었지. 나이 열여섯에 선방에 들어 근 20년을 끊임없이 불도에 정진했다네. 오랜 수도생활 끝에 희미하게나마 화두의 끝 부분을 볼 수 있었네. 그런데 어느 날 스님은 덜컥 마(魔)에 걸려 꼬리가 잡히고 말았네. 오랜 세월 스님을 연모했던 마을 처녀가 욕망의 불길에 미쳐 스님 방으로 쳐들어온 거야.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하며 구도에 목을 매던 그 스님은 미친 욕화의 불에 스스로를 불태워 버렸네. 색의 경계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야.」

「…….」

「마란 놈은 항상 그렇게 불시에 가장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기 마련일세. 그 또한 오묘한 하늘의 섭리지……. 절정의 순간, 스님은 마군이로 추락하여 쾌락으로 몸부림 치는 마물의 목을 졸랐지. 죽인 건 여인이 아니라 마물이었고 20년 세월을 싸워 온 스스로의 화두였네.」

스님의 입가에 냉소가 어린다.

「그때부터 그 돌중의 광태는 도를 더해 갔네. 느닷없이 그 여인을 천도한다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불을 질렀네.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돌중은 눈물을 줄줄 흘렸지.」

동삼은 그 스님이 초성 스님 자신인 것을 직감했다.

「법정에서 돌중은 살인 및 사체 유기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네. 돌중은 스스로 항소를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렸네.」

스님의 동공이 허공에 뜬다.

「이보시게.」

「예.」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닐세. 두려운 건 업이야.」

그 말을 끝으로 스님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스님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동삼이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되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

「참, 나! 살다 살다 그런 사람 처음 봤당께. 나가 설마 뒤통수 맞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혀 본 적이 없었는디.」

「왜?」

「척 보니 호구더랑께. 당신도 알잖는가. 나가 하수들 손 모양 보면서 얼마나 피눈물 나게 연습혔는지. 손가락 떨며 놓기, 착수헐라고 가다가 일부러 돌 떨구기, 착수하며 돌 튀기기. 그래도 입때까지 한 번도 들켜 본 적이 없었는디 그걸 알아보는 놈이 있더란 말시.」

「그래서 급수가 들켰단 말인가?」

「아니어라. 나가 8급이라 혔는디 자기는 4급이라 하더랑께. 막상 두어 보니 4급? 짱짱한 유단자급이더란 말시.」

「따져 보지 그랬어?」

「아, 따져 봤지. 그 양반 말이, 자기도 연습만 좀 하면 12급짜리처럼 둘 수도 있다 하질 않는 개비여. 할 말이 없었당께로.」

「야! 그 사람 정말 귀신은 귀신이네! 자네의 그 완벽한 손을 눈치 채다니!」

사람들이 박장대소한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소리만 듣고 쪽집게처럼 급수를 맞춰 내는 사람을 본 적도 있는걸?」

「에이, 설마.」

「정말이야. 내 친구 사무실에 갔다가 거기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사장실 안에서 바둑 두는 소리만 듣고 한 사람은 6, 7급 정도? 또 한 사람은 2급 정도? 하면서 맞추는데 내가 깜짝 놀랐다니까.」

건너편에서는 내기바둑이 한창이다. 후줄근한 복장의 두 사내가 바둑을 두고 있다. 텁수룩한 수염하며 헝클어진 머리가 서로 닮은꼴이다. 콩 볶는 소리를 내며 귀에 착수하다 말고 한 사내가 돌연 손을 빼서 큰 곳으로 간다. 맞은편 사내가 곧바로 귀에 치중하며 손을 뺀 사내에게 화를 낸다.

「이 양반아! 손을 빼면 뺀다고 말이라도 하고 빼야지!」

손을 뺀 귀는 치중수로 죽어 버렸다.

그때 기원 문이 삐걱 열리더니 덥수룩한 모습의 한 사내가 들어선다. 원장은 사내를 보자 깜짝 놀란다.

「아니! 추 사범이 여긴 어쩐 일이오? 그 동안 어디 있었소?」

「황판수를 찾아왔소.」

동삼이 무덤덤하게 자신이 온 목적을 밝힌다.

「황판수씨? 여기 안 나온 지 오래 됐소.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워낙 그런 사람이긴 하지만…… 들리는 소문엔 어디로 떴다는 말도 있고. 그나저나 그 동안 어떻게 지냈소?」

「어디 알 만한 사람은 없소?」

「글쎄 누구 한 사람 특별히 친하게 지낸 사람이 없다 보니…… 아마 지방으로 원정 갔을 거요.」

동삼이 선 자리에서 되돌아선다.

거리에 눈이 내린다. 세모의 삭풍이 거리를 휩쓸며 지나간다. 연말을 맞아 시가지는 한창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대부분 돌아갈 가정이 있고 식솔이 있다.

동삼은 바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었다. 어느 전파사 앞 고물 스피커에서 케케묵은 가요가 흘러나온다.

정이 많았던 사내. 평생을 승부와 더불어,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승부의 환영을 좇아 끝없이 방황하던 사내 황판수. 언젠가 병으로 죽은 선배 화투꾼의 장지에 같이 간 적이 있었다. 하관시, 화투를 한 모 던져 주며 황판수가 말했다.

「가는 길이 외로울 텐데 손맛이라도 보며 가시오.」

가슴이 울컥 맺힌다. 떠돌아다니면서 좀체로 그런 적이 없었는데 사람이 그리웠다. 황판수를 만나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가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면 그와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밤새도록…….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동삼은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