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밤 이슥할 무렵, 일찌감치 퇴근했던 권 원장이 자정이 가까워서 기원으로 돌아왔다. 원장은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기원 안에는 그날따라 야통하는 사람이 적었고 그나마 모두 잠들어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 동삼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혼자 무슨 맛으로 술을 마시는 거요. 나랑 같이 한잔 합시다.」

권 원장이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봉지를 내민다. 봉지 안에는 소주와 안주가 가득했다.

「함께들 술 한잔 하려고 했더니 오늘따라 자는 사람뿐이군.」

원장이 투덜대며 술병을 딴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소주 한 병이 비워지고 두 병째 병을 따며 원장이 비로소 입을 연다.

「추 주사. 산다는 게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소.」

「…….」

「아비라는 작자가 이제 코흘리개를 겨우 면한 자식새끼에게 못할 짓을 하지 않나…….」

원장의 모습이 침통하다.

「추 주사. 오늘 내 푸념 좀 해야겠소. 들어 주시구려.」

「예.」

「그러니까 30년 가까이 된 옛 이야기요.」

옛일을 더듬는 권 원장의 술 취한 얼굴이 가물가물한다.

「아버지는 고수였소. 기재가 있었는지 일정한 스승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바둑을 배웠는데도 무적의 고수였소. 그 당시 난 아버지가 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소. 어린 마음이었지만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소. 내 비록 타고난 재주가 미흡해도 바둑을 보는 눈은 있었소. 촌 구석 바둑이었지만 아버지가 마음 먹어 이기지 못하는 상대가 없었지요.

그런 아버지가 꼭 한 번 좌절하는 것을 봤소. 내 나이 열일곱 때였소. 하루는 아버지가 새벽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생전 처음 봤소. 마치 뭐랄까,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그러더군요. 냉수 한잔 떠 오너라.」

「냉수 한잔 떠 오너라.」

권오현(權悟賢)은 아들이 떠 온 냉수 한 사발을 단숨에 벌컥벌컥 비웠다. 그제사 권오현은 숨이 조금 트이는지 아들을 내려다본다.

「바둑판을 가져오너라.」

바둑판 위에 복기를 시작하며 권오현은 아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백의 바둑을 유념해 보거라. 이제 너는 진정한 고수의 바둑을 보게 될 것이다.」

권오현은 신중한 자세로 바둑을 복기했다.

바둑을 보는 아들의 눈이 점점 커진다. 세상에 이런 바둑이 있다니. 이 유려한 행마, 이 날카로운 공격, 목줄을 죄는 듯한 중압감, 그리고 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듯한 완벽한 마무리……. 아들은 소름이 오싹 돋는다.

먼동이 훤히 밝아올 즈음 권오현의 복기가 끝났다. 바둑판 앞에 석상처럼 앉아 있는 권오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보았느냐?」

「예.」

「고수의 바둑은 이렇다.」

경악스러워하며 바둑을 보던 아들이 물었다.

「누구의 바둑입니까?」

「추평사…… 조선의 국수니라.」

「추평사!」

「이 아비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당대의 명인이 될 수 없다. 추평사란 사람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그런 바둑의 경지를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권오현의 음성은 목이 잠겨 거칠거칠했다.

「너 또한 당대의 명인이 될 수 없다.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비의 말에 아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너를 나무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대승(大乘)의 경지는 천품과 스승이 합일되어야만 이룰 수 있다. 허나 이 아비는 불행히도 나를 일깨워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나에게 하나만 약조해 주겠느냐?」

「말씀하십시오.」

「언젠가 나의 후손 중에 천품을 타고난 인재가 있거든 기필코 후대의 명인을 만들도록 해라. 너 정도가 되면 그 터를 닦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터.」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선친과 그런 약속을 한 내가 이제 자식을 그런 길로 내몰다니…… 추 주사, 사람 사는 게 도대체 뭐요?」

동삼은 눈을 감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떠돌 때 늦은 밤에 웬 사람이 숙소를 찾아왔다. 그날 딱 한 번 아버지의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패하고 난 뒤 사내는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권 원장의 선친이라니……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라고 동삼은 생각한다.

어느새 권 원장은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존다. 

유성기원에 오기 전 동삼은 대구의 한 기원에서 어느 떠돌이기객의 죽음을 보았다.

밥보다 술을 즐겼던 기객은 동삼이 그 기원에 드나든 지 한 달 만에 기원에서 죽었다. 죽고 난 후 유품으로 지폐 몇 장과 피우다 남은 담배 한 갑 그리고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염주[短珠]가 나왔다. 그 염주는 승부와 삶의 경계를 넘나들던 부적(符籍)이었다. 그 염주가 불현듯이 동삼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