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일의 기객 추평사 선생이오. 저 분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가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것뿐이어서…… 하지만 오늘 막상 대면하고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싶소. 원래 소문이란 게 과장되기 마련이라지만…… 소문의 진상은 차치하고라도 저 분과 넉 점이든 다섯 점이든 마주 앉아 바둑을 두었다는 자체가 내겐 일생일대의 영광이오.」

사내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동삼의 가슴이 벅차 올랐다.

아버지와 바둑 한 판 둔 것이 평생의 영광이라니.

주막집 앞에서 인력거가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인력거에서 웬 사람이 황급히 내렸다. 60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이게 누구시오! 추선생 아니시오!」

노인은 평사를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나 모르겠소? 옛날 정 역관 집에서 자주 만났잖소.」

평사가 노인을 알아본다.

「그나저나 하마터면 몰라보고 그냥 지나칠 뻔했소이다. 세월이 흘렀다지만…… 많이 변했구려.」

「…….」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희 집으로 가십시다. 추선생을 뫼시고 싶소.」

노인이 평사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박 노인은 수원에서 이름 난 갑부였다. 평사가 여목 스승에게 쫓겨나 정 역관의 집에 머물러 있을 무렵 노인은 그 당시 수원에서 이름을 떨치던 기객들을 데리고 정 역관의 사랑채에 나타나 평사에게 여러 번 당한 적이 있었다.

노인의 집에서 동삼은 아버지와 함께 환대를 받았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아버지가 간혹 바둑을 두어 주면 바둑을 배운 사람들로부터 사소한 사례는 받았지만 이렇게 융숭한 대접은 처음이었다.

아버지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노인의 사랑채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매일 밤 술잔치가 벌어졌다. 분단장을 곱게 한 여자들이 드나들었으며, 아버지는 바둑을 두는 자리든, 술자리든 어떤 자리에서나 상석에 앉았다.

아버지가 상대하는 바둑꾼들은 대다수 중년의 나이였지만 더러는 젊은 사람도 있었고 드물게는 고령의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여러 점을 놓았다.

아버지는 상대가 누구든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을 상대해 주었다. 다만 동삼이 보기에 아버지는 습관적으로 대국에 응할 뿐 별다른 의욕은 없어 보였다. 승부에 대한 집착은 전혀 찾아보기 힘들었고 겉치레로 통 속의 돌을 바둑판 위에 옮겨 놓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아버지가 지는 바둑은 손꼽힐 정도였다.

단 한 번 아버지가 관심을 가졌던 대국이 있었다.

한 달 전쯤인가 대전(大田) 근처 유성(儒城)에서 유숙할 때였다. 밤이 늦은 시각에 웬 사람이 삿갓을 쓰고 홀연히 우리가 거처하고 있는 숙소에 나타났다.

그는 다짜고짜 아버지에게 한 수를 청했고 범상찮아 보이는 그를 상대로 아버지는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바둑판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는 흑을 쥐고 초반부터 파죽지세로 아버지의 진영을 파고들었다. 처음 그를 대수롭잖게 보았던 아버지도 시간이 흐르자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때 동삼은 처음 아버지가 바둑판 앞에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았다.

거의 무표정한 아버지의 얼굴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렀고 눈은 보기에도 섬뜩하리만큼 무서웠다.

새벽녘에 끝난 바둑은 초반의 비세를 뒤엎고 아버지가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그 사람은 들어올 때와는 달리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고 물러났다. 그가 방에서 나가자 아버지는 그와 방금 전 두었던 바둑의 초반 부분을 잠시 복기하다가 돌을 거두고 자리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에게 물었다.

「바둑을 좋아하느냐?」

「예.」

「그것만으론 고수가 될 수 없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왠지 동삼은 자신이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동삼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박 노인의 집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문 평사와 동삼은 조금 더 유하다 가라는 박 노인의 간청을 물리치고 경성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