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이 방 안에 길게 드리워진다.

눈을 감고 있는 해봉처사의 손에서 염주가 끊임없이 돌아간다.

박 화백은 바둑으로 점철된 한 인간의 삶을 생각하며 가슴이 메인다. 박 화백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기구한 운명이 흐느끼는 소리였다. 기구한 운명이 흐느끼는 그 소리는 검푸른 진혼곡이 되어 구천을 맴돌다가 피처럼 붉은 넋으로 화한다.

한동안 잠잠하던 바람이 또다시 불어와 문고리를 잡아 흔든다. 삭풍은 문 밖에서도 울고, 나뭇가지 끝에서도 울고 박 화백의 마음속에서도 운다.

박 화백은 자신도 모르게 칠순 노인 앞인 것도 잊은 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스님의 독경소리가 바람결에 들려 온다.

휘루루루.

어디서 산새가 우나 보다.

19부. 아버지와 아들

「화정이는 이태 전에 죽었소.」

숙향(淑香)의 말투는 냉랭했다. 숙향은 화정과 가장 절친했던 기방 선배였다. 옛날 평사가 화정의 곁에 눌어붙어 있을 때부터 숙향은 평사를 못마땅해했다. 간혹 화정의 살림집에 들르면 늘 술에 취해 빈둥거리는 평사를 보고 저 사내의 어디가 좋아 화정이 빠졌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기생 팔자 아무리 기박하다지만…… 어찌 그리도 무심하단 말이오……. 정말 너무 하셨소……. 그 긴 세월 소식 한 줄 없다가 이제야 나타나다니…….」

기방 뜰에 꽃잎이 흩어진다.

언제나 꽃잎이 흩어졌다.

화정이와 같이 살았던 그 집 뜰에서도 꽃잎이 흩어졌고 화정을 처음 보았던 그날의 적산가옥에서도 꽃잎은 우수수 소리없이 흩어졌다.

언젠가 술에 취해 화정을 다시 만난 그 서러웠던 밤에도 꽃잎은 어김없이 흩어졌다.

술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평사의 해골 같은 모습과 기생으로서는 환갑진갑 다 지나갔다고 하지만 아직도 은근히 색기를 뿌리고 있는 숙향의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화정이는 애를 낳다 죽었소.」

숙향은 거침없이 화정의 사인(死因)을 밝힌다.

평사는 잠자코 말이 없다.

「화정이는 기방에서 웃음을 팔았을지언정 지조 있는 여자였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애 딸린 기생이 술청에 나가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지요…… 서방님이 떠난 그 긴 세월 동안 화정은 단 한 번도 사내를 들인 적이 없었소…… 아이가 호열자로 앓아 눕자 어쩔 수 없이 화정이는 죽자살자 쫓아다니던 돈 많은 홀애비에게 몸을 의탁했소.」

뜰에 또다시 꽃잎이 흩어진다. 매화같이 차갑고 아릿다운 얼굴이. 진달래같이 슬프고 애잔한 여자의 얼굴이…….

「야속타 생각 마시오. 야속한 건 죽은 화정이 아니라 평생 가야 소식 한 번 없던 서방님이오.」

「…….」

「그렇게나마 다른 남자 만나 잘살 줄 알았는데…… 박복한 년…… 그리 살다 갈 것을…….」

「아이는?」

「화정이가 죽고 얼마 안 있어 웬 스님이 와서 데려갔소……. 아이의 양부가 이내 재가를 하였소.」

「스님이라 하셨소?」

「법고라는 법명을 쓰는 스님인데 광릉(光陵)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란 절에 기거한다고 들었습니다.」

평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앉으시오.」

숙향이 일어서는 평사를 잡는다.

「내 술 한잔 받고 가시오. 서방님이 그냥 가시면 죽은 화정이가 이년을 욕하지 않겠소.」

술을 따르는 숙향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술을 받아 든 평사가 물끄러미 술잔을 바라본다. 술잔 속의 술이 조금씩 흔들린다.

아이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잔솔가지를 불더미 속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바짝 마른 가지는 이내 불씨를 만들며 거세게 타올랐다. 아이는 평사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불길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풍경을 잡아채 흔들었다. 뎅거렁 뎅거렁 소리에 불현듯이 고개를 돌린 아이의 눈과 평사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눈길을 돌리더니 또다시 잔솔가지를 불길 속에 밀어 넣었다.

평사도 말이 없었고 아이도 말이 없었다. 그대로 두면 영원히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과묵한 아이였다.

평사는 한눈에 아이의 얼굴이 낯익어 보였다.

「네가 동삼이냐?」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뜨거운 불길을 받은 아이의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피어 올랐다.

「스님을 불러 주겠느냐?」

아이는 손에 들려 있던 마지막 솔가지를 불길에 던져 넣고 스님이 있는 법당 쪽으로 달려갔다. 평사는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객실에 든 지 얼마 후 법고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셨소이까.」

합장을 하며 인사를 건네는 법고의 투박한 얼굴에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헤어진 지 며칠 안 되는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는 말투였다.

「그나저나 왜 이리 늦었소. 객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은 들었소만 추 선생을 기다리다가 이 돌중 숨 넘어가는 줄 알았소이다.」

법고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법의를 추스리더니 평사와 마주 보고 앉았다.

「몰골이 많이 상했소이다그려. 복도 많소. 소승보다 먼저 해탈할 것 같으니.」

법고의 말에 평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쓰디쓴 미소 속에는 지나온 세월의 아픔이 두껍게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