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전 직원과 모든 캐디를 동원해서 제설작업을 하라는 본부장의 지시를 받은 최팀장은 화가 치밀었다.

“본부장님! 18홀을 어떻게 하루에 치워요. 회장님이 페어웨이의 눈까지 치우라고 하셨다면서요. 불가능한 거 잘 아시잖아요.”

“우리가 이런 일 한두 번 당해봤냐. VIP들이 온다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페어웨이에 눈이 15센티가 쌓였어요. 눈이 바람에 밀려 쌓인 데는 30센티가 넘어요. 그린은 일부 얼어붙은 곳도 있고요. 그걸 하루에 어떻게 정리해요.”

“최팀장이 고생하는 거 내가 잘 알아! 그래도 어쩌겠나, 회장님 지시잖아. 페어웨이는 중간 중간에 있는 볼이 떨어지는 IP지점 주변들만 제설하고 그린도 홀컵 꽂을 곳 주변만 제설해.”

할 말을 마친 본부장이 휭하니 나가버렸다. 그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이번 기회에 이런 날 라운딩 하려고 덤비는 미친 것들 낯짝이나 봐둬야겠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출근한 마스터에게 화풀이라도 하듯 최팀장이 내뱉었다.

“그러게요! 제정신들이 아닌 거죠. 한 팀 4명이 볼을 치겠다고 이런 난리를 치게 만들다니 기가 차네요. 제가 캐디들을 최대한 불렀어요. 하우스캐디는 물론이고 주말캐디들까지 합치면 100명 넘게 나올 거예요.”

“고마워! 자기밖에 없네.”

직원들과 캐디 등 모두가 모이자 본부장이 나서서 지시를 내렸다.

“이 와중에도 150명이 넘게 모여 줘서 본부장으로서 무척 고맙다. 오늘은 작업 강도가 무척 세다. 힘껏 노력해주기 바란다. 회사는 장비와 도구를 최대한 지원하겠다. 그리고 수시로 온수와 간식을 제공해서 여러분들이 몸을 녹이고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하겠다. 우리는 몸이 재산이다. 특히 작업 중에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너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골프장이 공평하고 평등하다고 생각 하냐?”

때 아닌 제설작업에 불려나와 잔뜩 뿔이 난 듯 연지가 현균에게 말했다.

“회장님이 VIP를 모시는 것이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결정했겠지. 중요한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위해서 만나는 일일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조금 고생해서 좋은 일이 생기면 보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더 고맙겠다. 그런데 나는 네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최대한 긍정하려 애쓰는 게 보여서 그게 더 안쓰럽다.”

현균은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하고 넉가래로 눈만 밀어대고 있었다. 사실 그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봄부터 보아온 골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곳도 모두에게 그다지 공평하게 사는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 애써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이곳이 마지막 보루임을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곳마저 부정을 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 내 희망을 모두 버려야 할 거야.’

절망을 하지 않기 위해 그는 희망을 끌어안고 있는 중이었다. 현균과 사랑싸움 중인 연지는 위태위태한 그가 걱정되면서도 그의 마음이 단단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질러본 것이었다. 말없이 눈만 밀고 있는 그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야! 같이 해. 너는 힘이 남아 도냐!”

짐짓 밝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녀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냈다.

“본부장님! 이 명단이 맞는 거죠?”

출근하자마자 오늘 라운딩 하는 팀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던 최팀장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명단은 이상 없다. 다만 정애라는 사람은 우리가 아는 정애가 아니겠지. 만약 맞는 거라면 그게 말이 되겠냐? 아마 직원들이나 캐디들한테서 폭동이 일어날 거다.”

맞는 말이었다. 어제 아침 일찍 시작된 제설작업은 점심시간 딱 한 시간만 빼고 나이트까지 밝히고 진행해서야 겨우 마쳤다. 150여명이 녹초가 되면서 작업을 한 결과 겨우 라운딩이 가능할 만큼의 제설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여 작업을 했는데 같이 일하던 캐디가 그곳에서 라운딩을 한다면 다들 뒤로 넘어갈 일이니까.

“맞아요. 그 애가 아닐 겁니다. 그래야 해요.”

잠시 후, 회장님 일행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에 본부장과 팀장들이 클럽하우스 출입문 앞에 도열했다. 본부장과 최팀장이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혹시라도 ‘정애’가 그들이 아는 그녀라면 큰일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고급 승용차 세대가 클럽하우스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네 대가 아닌 세대인 것이 의아했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맨 앞에 도착한 회장 차 뒷문을 본부장이 얼른 열었다. 그러자 서둘러 내린 회장이 잠깐 손을 들어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부리나케 뒤차의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리더니 천회장에게 조수석 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잠시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던 그는 황급히 조수석으로 이동해 정중하게 문을 열었다.

“얼마나 대단한 손님이기에 회장님께 직접 문을 열라는 거야.”

본부장이 옆에 있는 최팀장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진짜 VIP는 저사람 인가 봐요!”

처음에는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최고급 골프의상에 선글라스마저 낀 당당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린 그녀가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 안경을 벗어 보이기 전까지는! 그 사이에 김회장이 손수 문을 열고 내리더니 그녀의 곁으로 와서 살짝 허리를 굽혔다. 천회장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잠시 혼란스러움이 스쳤다. 아는 얼굴 같기도 해서였다.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긴가민가 혼란스러워 하는 천회장의 궁금증을 그녀가 해소해 주었다.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밝고 낭랑하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그는 그녀를 떠올렸다.

“너는 정애,,, 아니 어떻게,,, 아이쿠 사모님 안녕하세요!”

그는 허둥거리며 간신히 그러나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온갖 풍파를 겪은 사람은 달랐다. 그 사이에 김차관이 차 앞으로 돌아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김회장을 제외한 모두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정애는 미소를 한껏 날리며 하늘하늘 걸어서 지나쳤다.

“저거 정애 아냐!”

마스터가 가장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는 오늘 라운딩의 캐디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 정말로 정애가 맞는 거지?”

본부장이 신음처럼 말을 이었다.

“아이쿠!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이거 정말 큰일 났네요!”

최팀장은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일행들이 클럽하우스 안으로 사라지자 밖에 도열해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대부분 머리를 감싸 쥐거나 허공을 향해 악쓰듯 소리를 질렀고, 일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본부장님 이게 뭡니까. 저희들이 눈앞에서 본 것이 사실입니까?”

눈을 치우느라 가장 고생을 한 코스팀장이 본부장 앞으로 달려들 듯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본부장은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뒤돌아 서버렸다. 그 사이에 도열했던 모든 직원들이 본부장을 에워쌌다.

“다들 진정해라! 나도 지금 처음 알았다.”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제가 오늘 정애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겁니까? 나 못해요!”

마스터가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다.

“갑자기 그럼 어떻게 하냐. 회장님도 마스터가 하는 것으로 알고 계셔.”

“회장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신대요.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세요.”

“회장님도 모르고 계시다 당황해 하시는 거, 우리 눈으로 다 봤잖아. 정애 저년이 우리를 엿 먹이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제가 오늘 진행을 맡을 수 없다는 거잖아요.”

“일단 모두 진정들 하자.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러면 회장님과 회사만 난처해져.”

울분을 참지 못하는 직원들을 본부장이 겨우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추위도 잊은 채, 클럽하우스 앞에는 본부장과 경기팀장, 마스터만 남았다.

“제가 골프장에서 일한 게 처음으로 후회되네요.”

최팀장이 자조 섞인 말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마스터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도 살면서 오늘만큼 힘든 날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본부장이 힘없는 발걸음을 클럽하우스 안으로 옮기며 말했다.

“나는 들어가서 회장님 보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