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애의 일정이 변경되면서 갑자기 저녁 시간에 여유가 생긴 마성은 심심해졌다. 혼자 저녁을 마친 그는 즐겨 마시는 커피를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이번 생은 꽤 성공적인거야!’

여유로움으로 인해 생각이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자 떠오른 느낌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거나 부족했던 적이 기억나지 않는 그였다. 그런 그이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자존감이 최고조인 것을 느꼈다.

‘정애씨가 내 마음을 이렇게 만들어주었어.’

그녀와 함께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민지도 그에게는 삶의 의미를 더하는 존재가 되었다. 내 피가 섞인 존재라야 가족이라는 생각은 그에게는 없었다. 가족이라는 구성원도 하나의 인연일 뿐, 몸이 사라지면 의미도 사라지고 인연의 끈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지금은 생을 영위하는 생명체로써 인연의 가치가 남아 있는 생을 살아가는 중이므로, 가족은 소중한 것이고 현재 이들은 그의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므로, 이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의무감도 함께 챙겨두었다.

“민지야, 저녁은 어떻게 했어?”

“엄마가 준비해둔 반찬들이 많아서 제가 챙겨먹었어요. 아저씨는요?”

“나도 먹었지. 엄마가 많이 늦지 않게 집에 오면 아저씨가 민지 만나러 갈게. 혹시 엄마 늦을지도 모르니 늦으면 먼저 자요.”

“네. 걱정하지마세요. 아저씨도 잘 쉬세요.”

지금처럼 이렇게 일상적인 내용으로 통화 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 인연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소통하는 모든 것이 인연인 것이다. 그 대상이 동물이나 식물이나 바위이거나 산이어도...

‘많은 인연들 중에 내게는 정애씨와 민지와의 인연이 제일 소중해.’

어두운 창에 실루엣처럼 비친 그의 얼굴에 잔잔하게 미소가 감돌았다.

타구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난 연지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나는 오늘 빽발이 좋아서 일이 수월했어.”

“쓰리백 팀이었어?”

“아니 포백인데 조인이야.”

“그럼 특별히 일이 쉽지도 않았겠는데.”

“2명씩 조인이었는데 서로 각각의 상대방들에게 신경 쓰느라 골프는 뒷전이더라고.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커플들 같았어.”

“부부는 아니었나보네.”

“크크. 응! 내 생각에는 두 커플 모두 골프텔에서 잔거 같아.”

“하하. 그럼 플레이는 안중에 없었겠네. 나도 오늘은 수월했어. 거의 싱글수준의 네 사람이었는데 내가 할 일은 카트 운전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척척 이었어. 18홀 내내 블랙 티에서 그린을 공략하더라고.”

“상당한 구력의 팀이었네. 이런 날도 있어야지 뭐!”

“맞아.”

일이 힘들지 않아서였을까 두 사람은 기운과 활력이 넘쳐보였다. 서로 어떤 영역에서든 접점을 가진 사람들은 그 공유되는 기억이나 공간으로 인해 감정도 공유하게 된다. 공유된 감정은 관심이 되고 그로 인해 특별해진다. 이미 다른 사람들과는 특별한 접점을 가진 그들이다. 마주 앉아 한쪽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커피를 마시면서도 두 사람의 달달한 시선은 서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작은 몸짓 하나에도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바람에 뒹구는 이파리에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면 날개가 달린 듯 공중을 유영할 수 있고, 노을이 예쁘게 물든다면 해가 숨어드는 바다 끝까지도 헤엄쳐 갈 수 있었다. 더구나 한창 젊은 그들이다. 본능의 조화는 다시금 그들을 본능 속으로 유혹했다.

“우리 자리 옮길까?”

그가 이끌자 그녀는 행복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원의 서비스에 몸을 맡긴 채 자세를 바꾸던 정애는 어색하고 무료했다. 다른 이의 손길이 몸을 씻기고 치장하는 일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어서 더욱 그랬다. 시선을 여기저기로 옮기던 그녀의 눈에 휴대폰이 보였다.

‘마성씨에게 카톡이나 보내야겠다.’

그녀가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앱을 실행시키자 잠자코 자신의 일을 하고 있던 여직원이 갑자기 그녀를 제지 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곳에서는 외부로 연락을 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다만, 전화나 문자나 톡을 제외한 휴대폰 사용은 가능하십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갑작스러운 제지에 그녀는 당황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규정입니다.”

그녀는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여기에 구금된 것도 아닌데, 더구나 나는 이곳에 손님으로 온 것인데!’

“여기가 어딘가요?”

“김회장님의 별장입니다.”

“아니 행정구역상 여기 위치가 어디인지 물었습니다.”

“그것은 말씀 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정애는 순간 머릿속에 불길함이 스쳤다.

“이상하네요. 외부로 연락이 안 된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말해줄 수가 없다. 제가 이곳의 손님인 것은 맞나요?”

“저는 고객님의 목욕과 치장을 도와드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 말은 이곳에서 제 처지가 손님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말 인가요?”

그렇지만 직원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일만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정애는 여직원의 손길을 거부했다.

“이러시면 고객님에게 불이익이 생깁니다.”

“지금 내게 협박까지 하시는 거네요.”

“아닙니다. 다만 고객님이 염려되고, 저는 제 일을 마쳐야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불이익을 받게 되고, 당신에게 염려까지 주는 일이 생긴다는 말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여직원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애는 흠칫 놀랐다. 그녀의 시선이 빳빳하게 날이 서 있었다. 이미 그녀는 말없이 서비스를 해주던 사람이 아니었다. 강제적으로 폭력을 이용해서 굴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결연함이 그녀의 얼굴과 눈길에 서려있었다.

“얌전히 계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의 서슬에 정애가 멈칫하자 그녀가 강압적인 말을 내뱉으며 어깨를 눌러 앉혔다.

“정말 회장님의 안목은 탁월하십니다.”

“차관님도 한눈에 알아보실 만큼 확실해 보이죠?”

“그동안 긴가민가한 경우도 많았고, 실제로 해보면 실망스러운 경우가 좀 많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데려온 여자는 척 봐도 알겠더군요.”

잠시 뒤에 있을 쾌락을 기대하며 잔뜩 들떠있는 김차관을 김회장은 자신만만하게 바라보았다. 아쉬운 점은 자신은 그 맛을 못 볼 것이라는 점이었다.

“왜요! 제가 맛보고 나서 회장님도 드셔보시겠습니까?”

아쉬움에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김회장을 보며 김차관이 물었다.

“아이고 무슨 그렇게 황망한 말씀을 하십니까. 감히 제가 어디에 흑심을 품는다는 말입니까. 차관님께서 마음에 흡족하시다면 저는 그것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저것이 마음에 쏙 드셔서 잘 품으시고 애첩으로 삼으시기만 바랄뿐입니다.”

그의 말에 김차관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저야말로 불감청이나 고소원입니다.”

김회장이 대접하는 보양제를 먹고 사우나에서 여자의 치장을 기다리는 그들은 마치 고관대작에게 자신의 여종에게 시중을 들게 하고 잇속 있는 청탁을 하는 조선시대의 지방토호세력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민주주의 시대임에도 자본주의가 창궐하는 현대는 노예나 종들을 제 것 인양 부리던 중세시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세상이다.

“이번 일이 잘 성사되면 제가 회장님께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무얼 그리 서두르십니까. 계집을 품에 품어 보시고 흡족하시면 그때 저의 작은 바람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여자에는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저도 큰 기대를 하겠습니다. 결과만 좋다면 무엇인들 못해드릴까요.”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