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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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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7회] 2부 숨겨진 기보 한 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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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사범, 자네들 전문기사 세계는 그런 식으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이 든 선배가 이야기하면 최소한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더구나 여기 고 사범은 자네에겐 선생님이잖아.」 박 화백의 지적에도 남 5단은 시큰둥했다. 박 화백과 고 사범은 그 길로 자리를 옮겨 다른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꽤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옮긴 술집엔 손님들이 붐볐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그 방송국 속기바둑 타이틀전 본선 대국이 방영되고 있었다. 이명선 2단과 김주연 6단의 대국이었는데 이명선 2단이 꿇어앉아 김주연 6단과 대국을 하고 있었다. 대국장의 모습이 비치자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고 사범이 한마디했다. 「저 친구 불편하게 왜 꿇어앉아 바둑을 두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끼여들었다. 「그게 바둑의 예의가 아니오?」 「예의는 무슨 예의. 꿇어앉아 두는 것은 일본애들이 하는 짓이지 우리와는 상관 없소. 다도만 해도 그래. 초의선사께서 말씀하신 다도에 어디 꿇어앉아 마시는 게 나와. 그런데도 일본을 추종하는 자들은 이것이 바른 다도다 하며 꿇어앉아서 차를 마신단 말이야. 바둑도 마찬가지야.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거 하나로 족한 거야. 안 그런가, 박 화백?」 박 화백이 고 사범의 말에 수긍한다. 고 사범이 내친김에 한마디 더 한다. 「그리고 뭣보다 한일기원 프로기사라는 자들, 그치들 보면 비위가 상해. 돈 많은 사장들 만나면 어떻게 뭐가 없나 비벼대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이 친구들 다른 데 가면 목에 기부스를 했는지 사람이 인사를 해도 고개도 까딱 안 해. 아는 척도 안 해요. 주변에서 바둑 좀 고수라고 오냐오냐 해주니까 이건 반전무인(盤前無人) 정도가 아니고 안하무인이야.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래. 전문기사라는 게 뭔가. 기도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구도의 길을 가는 장인들이지. 참 안타까워. 바둑을 배우기 전에 다른 것도 좀 배워야 하는 건데…….」 그러나 지금 박 화백이 찾아가고 있는 김백훈 7단은 그 호탕한 성격과 자유스러운 기질로 형편이 어려운 소년들을 무료 지도해 주며 돈에 구애받지 않고 바둑 연구실을 열어 후진 양성과 바둑 보급에 헌신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그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기사들 중 하나였다. 김백훈도 한때는 촉망받는 기사였다. 일본 유학파가 득세하던 당시의 기단에서 순 국산으로 이름을 떨쳤다. 비록 3 대 0으로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국내 기전에서 도전자가 되어 보기도 하였던 높은 기력의 소유자였다. 박 화백이 김 7단을 찾아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정 국수와 추동삼의 기보에 대한 해설을 부탁하기 위해서였고, 최근 김 7단은 그 동안 꾸준히 수집해 온 자료를 모아 『한국바둑야사』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었기에 혹시 추동삼에 관련되는 이야기가 있을까 해서였다. 그의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그는 책 출판에 관련되는 자료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박 화백은 자리에 앉자마자 김 7단에게 물었다. 「혹시 추동삼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대략 지금 나이가 60대 후반 정도 될 텐데…….」 「추동삼…… 뭐하는 사람인데요?」 대답 대신 박 화백은 기보를 꺼내 김 7단에게 내밀었다. 박 화백은 김 7단에게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기보에 적힌 몇 자의 글을 발견한 그는 이미 박 화백의 이야기를 귓전으로 흘리고 있었다. 잠시 후 기보를 살펴보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정 국수님이 하향 곡선을 타기 시작했지. 당시 40대 초반으로 바둑이 한참 원숙한 경지에 올라 있어 뚜렷한 후발 세력이 없는 가운데 보인 정 국수님의 이유 없는 하향세에 대해서 지금도 가끔씩 말들이 있어요. 그때 정 국수님이 5년만 더 그 자리를 지켜 주셨어도 한국 바둑은 지금보다는 10년 일찍 꽃을 피웠을 거라고……. 절대 강자가 있음으로써 도전하는 세력들이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법이니까. 어쩌면…… 이 패배로 인해 정 국수님이…….」 「바둑 한 판 진다고 그 사람의 바둑이 내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까?」 「그건 박 화백이 프로기사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요. 바둑은 어떤 면에서 기(氣)의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소. 타이틀전에서 먼저 1승을 올리는 것이 절대로 중요한 이유도 기선 제압이라는 점 때문에 그래요. 5번기나 7번기 승부에서 먼저 2승 또는 3승을 올린 사람이 뒤에 2연패 혹은 3연패를 당하면 마지막 승부에서 거의 지게 되는 이유도 이미 상대의 기백에 눌리기 때문이오. 하물며 필생의 적수에게 최선을 다해 바둑을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바둑을 지게 되면 그때 받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오.」 김 7단은 바둑판을 가져와 박 화백 앞에 놓았다. 「그나저나 우선 복기부터 해 봅시다.」 초반 20수까지 복기를 하면서 김 7단의 감탄이 두 번이나 터져 나왔다. 「이 우상귀에서 변으로 벌린 대(大) 밭 전(田) 자와 중앙으로 착점되는 대부분의 수들은 명(明)나라 국수 왕명수(王鳴首)의 대륙설과 같은 발상인데 아시다시피 당시의 바둑은 중앙을 공배로 생각했기 때문에 백을 쥐고 이런 식으로 둔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오. 당시에는 백을 쥐면 대체로 실리를 파고들었으니까…….」 포석 부분을 해설하는 김 7단의 설명은 막힘이 없었다. 기풍의 차이니까 굳이 못 둘 것도 없다는 식의 해설은 그가 보여 주는 몇 개의 참고도로 그런 대로 납득이 되었다. 그러나 박 화백은 내심 조금씩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정 국수가 평생 기보를 간직할 정도로 명국이었다면 추동삼이 어떤 확신 없이 그런 수를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중반전에 들어서면서부터 김 7단의 해설은 방향타를 놓친 조타수처럼 반상을 헤매기 시작했다. 박 화백이 집에서 혼자 복기하며 느꼈던 의문수에 대해서 질문하자 몇 번은 참고도를 보여 주며 이런 변화가 싫어서 흑은 이렇게 두었고 백은 이런 식으로 두지 않았을까, 또는 이런 결과가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두었을 것 같다는 식의 유보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박 화백이 최대의 의문수로 지적한 상변 싸움에서 흑이 붙여 왔을 때 백이 끼우는 수와 그 상태에서 백이 유보하고 중앙으로 한 칸 뛰는 수, 그리고 백의 눈목자 수에 도달하자 김 7단은 갈팡질팡 헤맸다. 반상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황급히 하나의 참고도를 만들고 감탄을 터뜨리며 「아, 이렇기 때문에 백이 끼웠구나! 정말 묘수네!」 그러다가도 다음 흑의 변화를 그려 보다가 「이건 아닌데, 그렇다면 백의 수에 흑의 이런 응수는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백의 수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하며 앞의 백의 착수에 대한 답을 전면 부정했다. 마침내 김 7단은 손을 들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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