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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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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5회] 1부 침묵하는 바둑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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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 완성되고 박 화백과 한 판의 바둑을 둔 그 다음날부터 국수는 자리에 몸져누웠다. 국수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악몽을 꾼 듯 국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이부자리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곤 했다. 국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지난날 자신이 둔 바둑들을 차근차근 복기하기 시작했다. 돌을 놓다가 심신이 지치면 국수는 보료에 기대어 박 화백이 그려 놓고 간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초상화를 바라보면 왠지 국수의 마음은 편안했다. 국수는 누워서 초상화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국수는 풋내기 젊은 화가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를 느꼈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그 전에…… 이 일은 자네가 꼭 들어 주어야 하네.」 단호한 어투에 강렬한 눈이다. 「약조를 해주게.」 노안에는 비장감마저 흐른다. 박 화백은 갑작스런 국수의 요구에 심적 부담은 있었으나 그의 뜻을 거역하기가 지금 이 상태에선 쉽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늦은 시각에 자신을 부른 국수의 의중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알겠습니다.」 「그 바둑판을 가져오게.」 국수가 가리킨 바둑판은 지난번 자신을 의혹에 빠뜨린 바로 그 바둑판이었다. 서재 후미진 자리에 바둑판은 그대로 있었다. 박 화백이 조심스레 바둑판을 들었을 때 바둑판은 흡사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무겁다는 생각보단 묘한 감정이 지나갔다. 박 화백이 구태여 바둑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의 마음은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박 화백은 바둑판을 가져다 국수 앞에 놓았다. 「……보를 벗겨 봐.」 국수의 말투는 어느덧 명령조로 변해 있었고 음성에 조금씩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박 화백은 떨리는 손으로 누렇게 변색된 삼베로 만든 보를 벗겼다. 보를 완전히 벗겨 내자 신비스러운 나무색에 한 점의 뒤틀림과 잡티도 없는 천지정목(天地柾目)으로 재단된 비자 바둑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둑판 위에는 손으로 직접 그어 기록한, 오래 되어 색이 바랜 기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기보는 세월의 탓인지 종이 끝이 쥐가 물어뜯어 놓은 것처럼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박 화백의 눈에 비친 바둑판은 자신의 미적 감각을 배제하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극상품이었다. 몇 년 전 300년 묵은 행자목판을 어렵게 구한 박 화백은 그 기품에 매료되어 지금도 그 바둑판을 가보처럼 귀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 박 화백의 눈에도 지금의 바둑판은 근본적으로 품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완벽한 선에 진귀한 결, 거기다가 별로 요란하지 않은 은은한 자태와 고고함이 사람의 재주라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는 명품이었다. 바둑판을 바라보는 정 국수의 얼굴에서 형언 할 수 없는 비감이 묻어났다. 박 화백은 정 국수를 의식하면서도 쉽게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2년 전인가, 학술연구차 중국에 갔다가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제남(濟南) 지하 박물관에서 당·송시대 어느 망명 고려인이 만들었다는 신품(神品) 청수자기(淸水瓷器)를 보고 크나큰 감동을 받은 기억이 문득 되살아났다. 무릇 모든 명품(名品), 명기(名器)에는 만든 사람의 혼이 깃들기 마련인데 눈앞에 있는 반(盤)이야말로 살아 숨쉬는 혼이 깃들어 보였다. 바둑판은 침묵하고 있었다.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밝음과 어둠을 넘나들며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긴 영겁의 세월을 바둑판은 깊게 침묵하고 있었다. 「펴 보게.」 판 위에 놓인 기보를 바라보던 국수가 이윽고 말했다. 박 화백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누렇게 변한 기보를 펼쳤다. 색 바랜 기보는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직접 선을 그어 기재한 낡고 오래 된 것이었고 기보 우측에는 몇 자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黑:鄭明雲 白:秋東三 日時:1968年 11月 5日~7日 場所:雪宿道場 立會:崔海秀 덤:4戶半 196手完 白不計勝 박 화백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1968년이라면 정명운 국수의 바둑이 한창 완숙기에 있을 때였고 당시 무적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추동삼. 생소한 이름의 그가 천하무적의 정 국수를 이기다니……. 「놓아 보게.」 국수가 자신의 머리맡에 미리 준비해 둔 바둑돌을 박 화백 쪽으로 밀었다. 「…….」 「놓아 봐.」 국수가 복기를 재촉한다. 박 화백은 가슴속에서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의문을 일단 접어둔 채 국수의 말에 따라 복기를 시작했다. 흑돌을 하나 집어 우상귀 소목에 첫 수를 놓는 순간 돌은 바둑판 속으로 깊숙이 묻혀 버린다. 당대 명인 고수들이 둔 바둑을 여러 번 복기해 본 박 화백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복기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한 수 한 수 착점을 하며 박 화백은 국수의 눈치를 살폈다. 국수는 보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듯 만 듯 무심히 반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20수, 백의 열 번째 착수가 반상에 떨어졌다. 박 화백으로서는 처음 보는 수였다. 우상귀에서 변으로 나아간 대(大) 밭전(田)자로 벌린 수였는데 초반 포석에서 그러한 형태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박 화백은 그 수에 대해 의문이 갔다. 「이상한 수가 아닙니까?」 「수의 발원(發源)은 취향이다. 취향일 뿐이다.」 국수의 어조는 단호했다. 바둑은 점점 세력과 실리의 양상으로 가고 있었다. 흑을 쥔 정 국수의 실리와 백을 쥔 추동삼의 세력 지향 형세였다. 아직 초반 포석중인데도 불구하고 박 화백은 내심 우러나오는 감탄을 삼켜야만 했다. 백의 24수. 좌변의 화점 아래 삼선의 갈라침이 아닌 화점(花點:바둑판에서 기본이 되는 아홉 개의 점)으로 갈라침은, 당시의 바둑은 중앙이 공배(空排:집이 안 되는 빈 공간)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흑도 아닌 백을 쥐고 그런 식의 포석을 하는 것은 파격적인 발상으로 느껴졌다. 초반 포석 부분을 바라보면서 국수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47수째 흑이 귀를 지킨 수를 보더니 불현듯이 국수의 입에서 자신을 질책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틀렸어! 그건 수가 아니야. 기리를 역행했어!」 국수의 얼굴에 비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둔 수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 또한 틀렸어! 기백이 넘쳐 강(强)이 유(柔)를 차단하였다!」 반상에 흑백의 돌들이 자리를 잡아 갈수록 박 화백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그 바둑 내용에 몰입되어 갔다. 한때는 입단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상당한 기력이었던 그였지만 기보에 표기된 한 수 한 수가 그에게는 의문투성이였다. 요즈음 전문기사의 기보를 복기해 보면 많은 부분 이해가 갔지만 두 사람의 대국은 전반적으로 난해한 부분이 많았다. 중반전에 접어들자 국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급박해진 상변의 전투가 그의 가슴에 전이되어 표정에 긴박감이 감돌았다. 상변에서 흑이 급소를 찌르며 백을 강하게 추궁하고 나섰는데 박 화백이 보기엔 중앙의 세력까지 엿보는 흑의 결정적 한 수로 보였다. 「이 수는 가히 천하 명점이 아닙니까!」 계속 스스로의 수를 자탄하는 국수가 일면 민망하였고 그 착점이 탁월한 호착으로 보여 박 화백이 물었다. 「명점이라…….」 「그렇습니다.」 「……명검(名劍)이긴 하나 도리(道理)가 박약하여 생(生)을 구 하지 못했다.」 국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진다. 과연 백은 흑의 수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이 흑의 착점 바로 옆에 끼워 붙였다. 급소 중에서도 상맥(上脈)이었다. 결과적으로 흑의 급소가 있었기에 가능한 급소를 유도한 수였다. 국수의 얼굴에 통한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흑은 백이 끼워 붙인 자리에 고육지책으로 되끼워 붙였으나 추동삼은 치열한 전투를 외면하고 중앙으로 손을 돌려 가장 평범하게 한 칸 뛰어 버린다. 국수는 그 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자책한다. 「저 자리로 내가 갔어야 했는데 실수였어. 일견 우둔한 것같이 보여도 그곳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수…… 점안이거늘…….」 국수는 흡사 지금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처럼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러워한다. 국수는 다시 반상을 노려본다. 박 화백의 가슴도 덩달아 조마조마하다. 박 화백의 손에서 다시 반상위로 돌이 떨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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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수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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