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행길가에 동삼은 서 있었다. 하루 종일 잔뜩 흐려 있던 하늘에서 조금씩 눈발이 비치기 시작한다.

옥화의 선술집 유리창에 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길가 나지막한 슬레이트 지붕 위로 제법 눈이 쌓여 갈 즈음 가게 문이 드르륵 열렸다. 청색 몸빼에 회색 털 스웨터를 입은 한 여인이 가게에서 나와 길 건너편 구멍가게로 걸어간다. 옥화였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산 옥화는 좁은 도로를 가로질러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문 앞에 쳐져 있는 주렴을 젖히고 들어가는 그녀의 여린 어깨가 어쩐지 무겁다.

젊어 한때 뭇 한량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녀의 미색은 어느덧 간 곳이 없고 남아 있는 건 세파에 시달린 질곡의 삶이었다.

동삼은 한동안 옥화가 들어간 낡고 퇴락한 가게를 바라보았다. 꼭 한 번 밖으로 나온 옥화는 더 이상 기척이 없다.

헤어질 때 두 번이나 자신에게 흰 털목도리를 건네 주었던 여자. 추운 것을 유난히 싫어했던 여자. 거칠고 투박한 성미 깊숙한 곳에 따스한 인정을 품고 살았던 그 여자 옥화. 동삼의 얼굴에 흐릿한 기억이 그려진다.

어디선가 퇴색한 낙엽이 동삼의 발 아래로 굴러간다. 낙엽은 내리는 눈 속에 금세 파묻힌다. 눈발이 차츰 굵어질 때까지 동삼은 그곳에 서 있었다.

소도시를 끼고 흐르는 강을 따라 쌓아 올린 방천(防川)가에 동삼은 앉아 있었다.

방천 저 끝에서부터 낙조가 내려오고 있었다. 방천가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어디선가 찝찔한 갯벌 냄새가 묻어 오는 것 같았다. 동삼은 곧 어둠이 내릴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날도 이렇게 노을이 지는 날이었던가…….

고가에는 그날 바람이 몹시 불었다.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설숙 스승은 옷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 세월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동삼이 석양을 보며 불쑥 스승에게 물었다. 그러나 동삼의 그 말은 스승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참 후 스승이 말했다.

「세월이 흐르는 게 아니고 인세(人世)가 흐르는 것이다.」

먼 곳을 바라보는 스승의 얼굴은 참으로 무상했다.

초성 스님…….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스님이 앉아 있었다. 감방 안 철창 사이로 손바닥만한 미명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스님의 모습이 섬뜩하도록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 스님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 왔다.

「생(生)은 사(死)를 보지 못하고 사는 생을 보지 못한다.」

「…….」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죽음을 생각지 않으며 죽음으로써 모든 것은 소멸된다.」

오랜만에 스님은 그 낭랑한 음성으로 한 차례 염불을 했다. 일출의 장엄함과 스님의 염불이 혼연히 일치되어 갔다. 어느덧 스님의 아름다운 얼굴에 빛과 그늘의 휘장이 드리워졌다.

스님은 그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떠나면서 스님은 옛 도반의 천도를 거부했다. 평생 회색빛 가사 장삼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스님은 왜 마지막 순간에 천도를 거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스님은 홀로 먼 길을 떠났다.

낙조 위로 서서히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동삼은 품속에서 빛이 바랜, 오래 된 기보를 한 장 끄집어냈다. 언젠가 설숙 스승이 건네 준 아버지 추평사의 마지막 대국이었다. 동삼은 기보를 흘러가는 개천 물 위에 가만히 띄운다. 기보는 개천을 따라 역수(驛水)가 되어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내려간다.

동삼은 축대에 기대어 흘러가는 개천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동삼은 1년에 한 번 정도 나를 찾아왔었다네.」

「그럼 추동삼 선생은 말년에 바둑을 떠나 있었습니까?」

「그렇지는 않다네. 한 번씩 찾아오면 통상 보름이나 한 달 가까이 머물렀는데 전혀 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 보면 빈 바둑판을 앞에 놓고 묵묵히 그걸 바라보고 있었네. 확실치는 않으나 동삼은 마지막까지 생사번뇌의 기도(棋道)를 강하게 갈구했다는 생각이 드네.」

「추동삼 선생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내가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죽고 난 뒤였네. 어느 겨울날 방천다리 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지. 시립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처리됐다네.」

「그것으로 그만입니까?」

「그렇다네.」

「천하의 명인이 그렇게 죽었단 말입니까?」

박 화백은 기가 막힌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일세.」

해봉처사의 모습은 비 개인 맑은 공기 속에 서 있는 한 그루 청정한 노송(老松)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생로병사일세.」

「그렇게 돌아가시고 그것으로 그만입니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습니까?」

「그의 유품이 하나 있었지.」

「유품이요!」

「바로 이것이네.」

해봉처사가 조그만 물건을 하나 꺼냈다. 밋밋한 가락지였다. 소록도에서 추동삼 선생이 황판수에게 받은 가락지. 황판수가 어머니 곁을 떠나면서 훔쳐 왔다는, 승부에 영험이 있다던 그 가락지였다.

박 화백은 그 가락지를 보자 불현듯이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자 애썼던 추동삼 선생도 범용한 인간으로서 평생 승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박 화백은 고개를 흔든다. 그 가락지는 삶의 가락지이자 그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으리라. 그는 삶의 마지막에 가서 어디론가 돌아가야 했건만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었으리라. 스승이 누워 계신 곁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객사한 친부의 곁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의 마지막 삶은 부생(浮生)이었다.

결국 추동삼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벽송이 떠올랐다. 주인 없는 그 바둑판이.

「처사님. 벽송은 어떡합니까?」

「…….」

「어떻게…….」

박 화백의 거듭된 질문에 해봉처사는 끝까지 한마디 대꾸가 없다.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만 돌린다.

사흘 밤낮에 걸친 긴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해봉처사 최해수는 회한에 젖어 아득한 창공에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본다.

박 화백도 먼 하늘을 본다.

높고 높은 하늘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