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범씨를 아시나요?」

황판수는 난데없는 성부영의 물음에 고요히 그녀를 바라본다. 비록 나환자이긴 하나 그녀의 얼굴엔 아직도 숨길 수 없는 미태가 남아 있었다. 원래 나병의 증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반문(斑紋), 신경(神經), 결절(結節) 나병으로 구분되나 대부분은 그 증세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성부영의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

「이젠 잊었소.」

이미 희노애락을 모두 초탈한 황판수가 덤덤하게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묻소?」

「그 사람 4년 전 겨울에 얼어 죽었습니다.」

「가련한 목숨이로고. 결국 그렇게 가고 말았구려.」

황판수는 잘려 나간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불현듯이 문둥이 무리에 끌려가서 곤욕을 치르던 그 완벽한 절망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죽었어야 했던 것을…….

나병에 걸린 사람들의 절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살을 기도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부모형제와도 완전히 연이 끊어지고, 인간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병보다 더 무서운 건 절망과 고독이다. 그래서 나환자들은 타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결국 다 그렇게 스러질 목숨이기에, 그저 담담히 보낼 뿐이다.

「김용택이란 사람을 아시는지요?」

「……아오.」

「제가 그 사람의 미망인입니다.」

황판수는 잠자코 말이 없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성부영은 황판수에게 일의 전말을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황판수가 장탄식을 한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려. 딱한 사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실대로 말을 할 것이지. 하기사 이것도 다 운명인 것을…….」

곡절이야 어찌 됐든 자신의 나병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그녀였지만 황판수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만나서 가끔 이석범과 김용택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하면 대할수록 성부영은 황판수에게 조금씩 빠져 들었다. 황판수는 넓고 깊었다. 성부영은 차츰 잿더미 속에서 한 줌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열정이 다 소진된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가슴에 황판수의 너그러운 인품이 조용히 와 닿았다.

동삼이 나환자 휴게실에 들어서자 황판수가 바둑을 두다 말고 동삼을 반갑게 맞는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 요즘도 매일 술인가?」

오랜 세월을 딛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는다.

「그렇찮아도 한 수 배우고 싶었는데 잘 왔어.」

황판수가 뭉툭한 손으로 돌을 집어 한쪽 귀에 치중을 한다. 잘려 나간 손가락으로 어찌 그리 절묘하게 바둑돌을 놓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다. 황판수의 한 수에 상대는 쩔쩔맨다.

「못된 버릇은 여전하군.」

동삼의 말에 황판수가

「자네에게 배운 걸세.」

「쓸데없는 것을 배웠군.」

황판수가 다시 돌을 들고 착점하며,

「생불여사라…… 죽느니보다 못한 목숨 아닌가.」

동삼이 황판수의 말을 받아,

「아닐세. 살다 보면 수가 생기는 법이지.」

「어쨌든 천하의 추 명인께서 모처럼 나타났으니 오늘은 내가 제대로 한 수 배워야지.」

동삼이 말을 바꾼다.

「기분은 어떤가?」

「그저 담담하네.」

「늘그막에 결혼이라니.」

「자네도 결혼을 하게. 오다가다 만난 여자 말고.」

동삼은 황판수를 찾아 벌써 여러 번 이곳을 다녀갔다.

「단종대라고 들어 봤나?」

「어떤 곳이야?」

「저기 저 뒤를 돌아가면 일제시대 때 쓰던 격리수용소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네.」

「…….」

「왜놈들이 조선인 나환자들의 씨를 말린다고 단종대에서 강제로 후손을 끊는 수술을 했지.」

한국 땅 어디를 가나 일제의 참혹했던 수탈과 야만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나환자들은 날이면 날마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후손조차 남기지 못했네. 나병은 결코 유전이 아닌데 말야.」

결혼식은 조촐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많은 나환자들이 진심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소록도에서 사람들의 삶에 가장 깊숙이 개입해 있는 간호사들과 의사들도 몇 명 참석했다. 신부 성부영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결혼을 주재하는 목사의 기도소리가 교회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 여기 한 쌍의 부부가 주님 앞에 다시 태어납니다. 주께서는 여러분들께 고난과 역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이런 축복받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은 주께서 여기 계신 모든 자식들을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야말로 주님의 진정한 은총인 것입니다.」

목사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계실 때 주께서는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내릴 것이며,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을 때 주께서는 우리를 천국의 문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은총이 이들 부부와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목사의 긴 설교가 끝나고 잔치가 벌어졌다. 구비구비 인생의 산마루를 돌아 이제 황판수의 아내가 된 성부영은 황판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해안에서는 좀체 구경하기 힘든 광경이라 했다.

아름다운 섬 소록도가 내리는 눈에 조용히 덮이고 있었다. 생긴 모습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 하여 소록도라 했다.

선착장의 배가 서서히 발동을 건다.

황판수는 눈이 내리는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어찌 저리 흴까.」

황판수가 중얼거린다.

눈이 두 사람 위로 펄펄 휘날린다.

「바깥 생각은 안 나나?」

「골치 아픈 세상 무얼 그리 생각나겠나…… 이젠 다 잊었어……. 난 이곳이 좋네. 주님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네.」

사람들이 배 위로 하나 둘 올라타기 사작한다. 황판수는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순금 가락지 하나를 꺼내 동삼에게 내밀었다. 조각 하나 없는 둥그런 구식 가락지였다.

「받게.」

「…….」

「옛날 집을 나올 때 훔쳐 온 내 어머니의 가락지일세.」

「이걸 왜 나에게 주는가?」

「여러 번 전당포를 들락거렸던 가락지일세. 신기하게도 그 가락지를 끼고 승부를 하면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어. 승부를 하다가 수세에 몰리면 나는 그 가락지를 돌리며 염원했지. 그러면 다시 운이 되돌아오곤 했네.」

승부라, 동삼의 가슴에 잔잔한 파장이 인다.

황판수가 손을 앞으로 내민다. 뭉툭하게 잘린 손이 보인다.

「이 손을 보게. 난 이제 더 이상 승부를 할 수가 없네. 그나마 낄 손가락조차 없으니 나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지.」

동삼이 잠자코 반지를 받아 넣는다.

「이젠 홀가분하군. 늘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황판수는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정말 개운해한다.

뱃고동소리가 선착장에 길게 울려 퍼진다. 눈발은 조금씩 가늘어지고 바다는 한 점 흔들림 없이 잔잔하다.

동삼이 천천히 뱃전에 오른다. 황판수는 그 자리에 서 있고, 동삼은 갑판 위에서 황판수를 건너다본다.

「잘 가게, 추 사범.」

배가 미끄러진다. 화투장 하나로 일세를 풍미했던 흘러간 승부사 황판수. 어두운 시대를 물처럼 떠돌았던 진정한 승부사 황판수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괸다.

배는 황판수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진다.

황판수의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3년이 지난 후 성부영은 황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

결혼 후 1년만에 그녀는 시력을 잃었고, 다시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비몽사몽간에 성부영은 꼭 한 번 이석범을 찾았다.

「세상에 머무는 건 잠깐 쉬어 가는 것이야…… 편히 가게나.」

아내를 보내는 황판수는 아무런 여한이 없었다.

그녀의 육신은 한줌 뼛가루로 화해 만령당(萬靈堂)에 안치됐다.

만령당을 내려가는데 그날따라 한록비(恨鹿碑)에 새겨진 어느 시인의 시구가 가슴에 사무친다.

……

어두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사람되어 한세상 살고도

고향 산천자락, 부모형제의 품에 눕지 못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