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총알이 반상을 물끄러미 본다. 지나온 세월들이 물처럼 구비구비 흘러간다.

맞은편에 앉은 서 중사는 월남전에서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은 일등 용사였으나 제대를 한 달 앞둔 마지막 전투에서 팔 한쪽을 잃었다. 귀국하여 그는 상이용사로 분류돼 나라에서 매달 지급하는 연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그도 여느 기객처럼 1급이 소원이었는데 그가 1급이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서 중사는 살림만 차리면 여자가 도망을 쳤다. 그것도 신접살림이라 하여 가전제품 이하 부엌 살림을 새것으로 깨끗하게 장만해 놓고 어떻게 잘살아 볼라치면 여자가 튀었다. 기원에서 한 이틀 야통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여자들은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모조리 들고 날라 버렸다.

두 번째 여자가 튀고 서 중사는 여자가 도망 갈 것에 대비해 살림살이를 모조리 중고품으로 바꿔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중고품으로 행마를 달리했는데도 여자들의 도주는 계속됐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다 찾아다녔지만 쪽집게 무당들도 도망가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점괘가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니나노 집에서 만났던 여섯 번째 여자가 야반도주하던,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 겨울, 서 중사는 학수고대하던 대망의 1급이 되었다.

1급이 되고 난 후 서 중사는 살림을 중단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자신은 이제 바둑과 결혼을 했고 바둑과 더불어 살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서 중사의 바둑은 세기를 더해 독립군 가운데 송강과 마공을 제외하고는 그 다음 서열이었다. 박 총알이 두 점으로 왔다갔다 하지만 서 중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두 점에는 시쳇말로 쨉이 안 된다. 마작은 박 총알이 조금 고수였고 바둑은 서 중사가 몇 수 위였다.

바둑이 끝나고 두 사람이 나란히 술집으로 향하는데 어느 틈에 삼보가 뒤따라 나간다. 언제부턴가 손가락 사건 이후 삼보는 두 사람 뒤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 문제의 사나이 허파 장이 등장한다. 독립군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파 장에게 집중된다.

허파 장은 적수가 없어 쉬고 있는 어느 기객 앞으로 가서 조용히 앉는다.

「선생, 나와 바둑 한번 두시겠소?」

허파 장의 정중한 요구에 손님이 승낙을 한다.

「그럽시다.」

「1·2빵(기본방 2에 방당 1의 방내기바둑)이면 어떻소?」

「만이천 원(만방에)짜리?」

「아무 거나 상관 없소. 더 크게 해도 좋고.」

「축방(무제한 방)으로?」

「물론이오.」

「근데 얼마나 두시오?」

「그런 거 알아 뭐하겠소. 자신이 없으면 흑을 쥐시오.」

손님이 잠시 생각하더니,

「까짓거 좋소이다. 어차피 승부니까.」

독립군들이 허파 장 주위로 살금살금 몰려든다. 바둑이 시작되기 전에 허파 장이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다.

「바둑이 조금 거치니 이해하시오.」

허파 장의 바둑은 황당했다. 허파 장의 바둑은 바둑이라기보다 일종의 절규였다. 허파 장은 끊을 수 있는 자리는 모두 끊었다. 한 판의 바둑에서 허파 장은 무려 스물여덟 번을 끊었다.

손님은 기가 막혀 허파 장을 힐끗힐끗 쳐다본다. 수읽기가 깊은 허파 장이긴 하나 무리하게 끊는 수로 일관하니 승부가 될 턱이 없었다. 바둑이 끝나자 허파 장은 아홉방을 졌다. 허파 장은 공손히 아홉방에 해당하는 금액을 손님에게 지불했다.

「미안하오, 선생. 언젠가는 나 자신을 찾을 날이 있지 않겠소.」

허파 장은 손님에게 사과를 하고 말없이 기원 밖으로 나간다. 독립군들이 혀를 끌끌 찬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해하는 손님에게 허파 장과 한때 단짝이었던 송강 계보의 반독립군 허류(許流:본명이 허경준인데 허류라는 이상한 필명을 쓰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을 신경 쓰이게 했다)가 부연 설명을 한다.

「형씨가 이해하소.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1년 전 큰 내기바둑에서 사고를 치고부터는 사람이 그렇게 변했소. 집 한 채 값이 왔다갔다 하는 큰 판에서 끊으면 대마 잡고 넉넉하게 이기는 바둑을 글쎄 괜히 들여다봐서 상대편의 돌을 연결시켜 주는 바람에 다 이겨 논 바둑을 져버렸지 않았겠소. 그 후 바둑을 두기만 하면 끊는 데 한이 맺힌 사람처럼 앞뒤 없이 무조건 끊어 놓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거요. 뼈에 사무친 비통하고 절통한 그 양반의 심정을 형씨 같은 점잖은 분은 이해를 해야 하는 거요. 게다가 그 때의 충격으로 인해 허파가 뒤집어져 수술까지 하고…….」

허파 장의 행동에 대해 기원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틀에 한 번 꼴로 기원에 나타나는 허파 장은 매번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돈을 버리고 가기 때문이었다. 소문엔 그 당시 잃은 돈도 돈이지만 이렇게 해서 버린 돈도 벌써 꽤나 된다는 것이었다.

허파 장이 나가고 원장 이하 몇몇 독립군들이 허파 장을 애석해한다.

「아쉽기는 하지만 잊어뿌야지. 저래 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사노.」

바둑 4급을 두는 건물 지하다방 주인의 말에,

「말이 쉽지 돈이 걸리 보소. 사람 환장하구마.」

허파 장을 잘 아는 길 건너 사거리에 있는 남해기원 독립군이 놀러 왔다가 다방 주인의 말에 비위가 상하는지 한마디한다. 모처럼 타 기원 독립군이 놀러 왔으니 장 원장이 보조를 안 맞춰 줄 수가 없다.

「자네 말이 맞네. 사람이 돈 문제가 걸리마 마음겉이 안 되는 기라. 우리 아부지도 팔십 평생을 돈 때문에 시달리다가 안 죽었나.」

장 원장 뒤는 항상 충호 차례다.

「오래도 시달��구마. 그기 비하마 성팔(허파 장 본명)이는 아무 것도 아이네.」

전직 은행원이었던 어느 호구가 대화에 끼여 든다.

「아무리 큰돈이라 하나 바둑 한 판에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이발소를 하다가 말아 먹고 근간에 독립군으로 편입된 어느 초짜 독립군이 그 말을 받아 폼을 잡는다.

「남의 일 가지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구마. 오죽하면 사람이 그렇게까지 됐겠능교.」

난롯가 옆 자리에서 혼자 복기를 하고 있던 안기복이 초짜의 말에 공감하는 척 한다.

「옳은 말이야. 얼매나 마음이 아프겠노 내가 바쁘더라도 시간 내서 언제 복기라도 한번

해 조야 겠다.」

기복이 옆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팔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끊어 버리지…….」

팔수 맞은편에는 이병태가 앉아 있다.

「마음이 또 허전해질라카네.」

누군가 지겨운지 한마디 물어 본다.

「본인은 뭐라 캅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허파 장의 단짝이었던 허류에게 쏠리고 허류가 허파 장의 심정을 대변한다.

「나한테라고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전에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다가 혼잣말로 이캅디다.」

「뭐라카던데?」

충호가 허류를 쳐다보며 들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인다.

「군대 있을 때 월남 못 간 게 후회스럽다 하더마요.」

허류의 말에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인 편 교수가

「시간이 더 가마 다 잊어뿐다꼬.」

하자

「시간이라 켓나?」

마지막은 동남기원의 거물 이 영감이다.

「와요?」

「사람한테는 시간으로 되는기 있고 안 되는기 있는기라 차라리 죽은 자식을 잊어뿌는기 낫지 그걸 우째 잊겠노.」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이 영감이 원로답게 허파 장 사건을 마무리한다.

「30년 전에도 그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는기라…….」

장 원장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들이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그때 당사자는 결국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고통을 가져가더마…….」

그것으로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