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은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깊이 후회했다.

분명 그 자리는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문제를 내놓은 당사자인 최해수가 머뭇거린 것도 그 이유였고, 명운이 비아냥거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문제와 비슷한 형태였다. 비록 외곽이 한 수 비어 있긴 했으나 그 당시 워낙 어렵게 문제를 풀었기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명운이 실패하는 순간 자신은 풀 수 있을 것 같아 무의식중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함정이 있을 줄이야. 새삼 바둑의 오묘한 변화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쨌든 자신의 섣부른 행동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하나.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지났건만…….

동삼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높다란 가을 하늘에 하얀 새털구름 한 무리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설숙은 지난 3년 동안 동삼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속마음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유독 동삼에게는 단 한 번의 내색도 없었다. 동삼이 혼자 바둑 공부를 하기 위해 서가에서 바둑책을 빼내 가도 개의치 않았고 틈 나는 대로 문하생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설숙의 냉담한 모습에 동삼은 도장이 짐스러웠다.

동삼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 중 하나는 개인적인 소망이긴 하나 기회가 닿으면 설숙의 문하에 들어 바둑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삼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바둑은 동삼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법고 스님으로부터 생전 처음 바둑을 접했을 때, 그때 동삼은 이유도 없이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공명(共鳴)이었다.

법고 스님은 자신에게 최초로 바둑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동삼은 스님을 통해 이기고 지는 승부의 법칙을 배웠다. 스님은 매번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다. 자신의 돌을 시침 뚝 떼고 잡아먹는 스님을 볼 때마다 그 순간만은 스님의 울퉁불퉁한 맨머리가 밉살스럽게 보였다.

「너의 아버지는 조선 제일의 국순데 넌 왜 이 모양이냐.」

하고 스님이 자신을 놀리면 어서 빨리 바둑을 배워 스님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리라 동삼은 다짐하곤 했다.

동삼은 날이면 날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망의 소리를 듣는다.

바둑을 두고 싶다…… 바둑을 두고 싶다…….

그러나 그 애틋한 소망은 언제나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된다. 아무도 없는 산 위에서 동삼은 진종일 갈망과 고뇌의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다.

동삼이 도장을 떠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버지였다. 동삼은 늘 꿈속에서 아버지가 도장문을 밀고 들어서는 것을 본다. 준열한 기세를 온몸에서 뿜어 내며 도장문을 밀고 들어서는 아버지의 입가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소가 있다. 동삼은 쫓아 나가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 손은 순식간에 형체가 없는 바람이 되고 동삼은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동삼은 스스로 최면에 걸려 미친 듯이 주문을 외운다.

아버지는 돌아온다. 아버지는 돌아온다…….

그래서 동삼은 식객도 아니고 정식으로 세경을 받는 마름도 아닌 어중간한 신분인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돌아오리라는 한가닥 희망의 끈을 조심스레 부여잡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 동삼은 미련없이 아버지를 따라서 설숙도장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일 뿐, 무의미한 기다림일 뿐 기약 없는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만 간다. 봄인가 하면 어느 결에 여름이 가고 뒷마당 뜰에 우수수 낙엽이 진다. 간밤엔 무서리가 내렸다.

동삼은 한숨을 푹 내쉰다.

떠날 수 없다. 지금 떠나면 지나 온 세월이 너무나 허망하고, 뿐이랴, 그 길로 영원히 바둑하고의 인연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동삼은 읽다 만 바둑책을 다시 들었다. 어쨌든 여기에는 바둑이 있고 혼자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사나흘에 한 번씩 마주치는 유민재와 명운의 대국은 매번 주위를 압도하는 살벌한 기운을 자아낸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두 사람의 대국은 항상 불꽃이 튄다. 가끔은 두 사람의 승부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칠 때가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설숙은 자신도 모르게 명운의 바둑에 자꾸만 눈이 간다. 보면 볼수록 재기와 근기를 타고난 기재였다. 한 번도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제일 대성할 수 있는 재목으로 생각했다.

유민재의 섬세한 손에서 떨어지는 흑돌이 중앙 백대마를 날카롭게 추궁한다.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민재의 창백한 얼굴에 오기가 서려 있다. 설숙이 보기에 민재는 몸이 약하고 선병질적이나 명운에 비해 재주는 그리 뒤떨어지는 편이 아니다.

명운이 중앙 백대마를 두텁게 잇는다. 설숙은 흰자위와 검은 동자의 윤곽이 뚜렷한 명운의 옹골찬 눈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흡족해한다.

얼마 전 명운은 조부의 제사를 모시러 용인에 다니러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용인 고수로 명성이 자자한 유달하(劉達河)를 흑·백을 번갈아 쥐고 일사천리로 밀어붙인 적이 있었다.

아직은 호승심이 강하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어린 나이인지라 명운은 도장에 돌아오자마자 동문들에게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녔다. 명운이 자랑삼아 복기하는 것을 설숙이 먼 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착수가 범상치 않음에 어느새 명운이 저렇게 성장했나 싶어 새삼 아이가 대견스러워 보였다.

꽃놀이 패가 났다. 명운으로서는 패를 양보해도 큰 손해가 없고 민재 입장에선 패를 지면 치명타를 입기에 유민재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부릅뜨고 반상을 노려본다. 승부는 어떻게 변화해도 명운 쪽으로 기울어질 조짐이다.

설숙은 자리를 떠나 안채 자신의 처소로 발길을 돌린다. 드물게 오래도록 지켜 본 제자들의 대국이었다.

안채에 들어선 설숙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서가 한켠에 있는 난초에 동삼이 물을 주고 있었다. 동삼은 성심을 다해 물을 주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행여 물이 바깥으로 튈까 조심스럽게 물을 주는 동삼의 행동이 침착해 보였다. 열린 봉창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양철 물조리개가 반짝반짝 빛을 반사했다. 물조리개를 들고 있는 동삼의 거친 손과 조리개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설숙이 들어서자 동삼이 일손을 멈추었다.

「물을 너무 자주 주면 뿌리가 상한다. 그러나 난에 물을 주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평사가 동삼을 맡기고 간 후 지금까지 설숙은 여간해서 동삼에게 말을 붙인 적이 없었다. 설숙이 그나마 동삼과 대화를 나누는 때는 주로 난을 돌보는 시간이었다. 뒤뜰과 서가 한켠에 가지런히 놓인 난들은 설숙이 무척이나 아끼는 것들이었다.

일을 끝낸 동삼이 서가에서 나간다. 초를 알맞게 먹인 여닫이 문은 소음이 없이 열리고 닫힌다. 난 잎에 간당간당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 하나가 기름 먹인 장판지 위에 뚝 떨어진다.

설숙은 동삼이 나가 버린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쩐지 동삼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착잡하다.

동삼은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장작을 패고, 불을 때고, 물을 길어 오는 잡일은 거의 동삼 차지였다. 동삼은 마치 그것 때문에 도장에 붙어 있기라도 하는 양 하루 종일 일만 했다. 이제 동삼은 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으로 굳어졌고 문하생들이나 안채 식구까지 누구나 동삼을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설숙은 동삼에게 기대를 했다. 평사가 워낙 탁월한 준재였기에 막연히 핏줄을 의식했다. 그러나 동삼의 대국을 몇 번 지켜 본 설숙은 동삼의 바둑에서 별다른 기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에 좀더 관심을 가져 보았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설숙이 보기에 동삼의 재질은 바둑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숙은 문하를 받아들이는 데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지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그 기준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평사의 아들인 동삼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확한 언질은 없었으나 평사가 자신에게 동삼을 맡긴 뜻만은 자명했다. 그러나 설숙은 한 아이의 장래에 대해 책임 지지 못할 짓은 하기 싫었다.

설숙은 나이가 들어 더 늦기 전에 동삼이 스스로 이 집을 나가 줬으면 하고 바랐다. 결코 동삼이 미워서가 아니라 동삼 자신을 위해서도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시키지도 않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동삼에게 설숙은 연민을 가졌고, 때로는 자신의 내자가 마치 하인 부리듯 하는데도 묵묵히 일만 하는 동삼을 보며 설숙은 일말의 부담을 느꼈다. 설숙은 동삼의 행동거지를 보며 동삼의 자질이 어쩌면 물산을 일으키는 상공업 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세월만 보내다가 설숙은 뜻밖에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는 줄 알았던 동삼이 실제로는 나름대로 바둑에 엄청난 열과 성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낙엽이 마당에 후둑후둑 떨어지던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설숙은 그날 대청 끝에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빗자루를 든 동삼이 나타나 마당의 낙엽을 쓸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찬찬히 비질을 하는 동삼을 보며 설숙은 그의 성격이 침착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였다. 마루를 내려오는 문하생들이 황급히 서두르다가 바둑돌통이 한 아이의 발에 걸려 마루 아래로 쏟아졌다. 통 속의 돌들이 주위로 흩어졌다. 아이들이 주섬주섬 흩어진 돌들을 주워 담았다.

돌 하나가 동삼의 발치에 데구르르 굴러 왔다. 비질을 하던 동삼은 동작을 멈추고 바둑돌을 주워 들었다. 동삼은 그 돌을 자신의 옷으로 정성스레 닦았다. 돌을 통에 주워 담은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갔다.

댓돌 끝에 미처 주워 담지 못한 바둑돌이 두어 개 있었다. 동삼이 다시 그 돌을 주워 옷으로 닦아 먼저 주운 돌과 함께 돌통에 담았다. 동삼의 행동은 담백했지만 그의 행동거지엔 어딘가 모르게 바둑에 대한 깊은 애정이 서려 있었다. 설숙은 왠지 가슴이 덜컥했다.

그 후로 설숙은 문득문득 동삼의 바둑에 대한 집착과 열성을 보곤 했다. 일이 없는 한가한 오후에는 문하생들의 대국을 어깨 너머로 구경했다. 서가에 있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발간된 바둑책을 아무도 모르게 제 방으로 가져가 밤새워 공부를 했고 꼭 필요한 부분은 필사를 하기도 했다. 드물게는 스승 여목이 손수 엮은 기보나 책이 며칠씩 사라졌다가 어느새 제자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동삼의 짓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설숙은 동삼의 그러한 행위에 대해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동삼이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애써 막을 필요도 없었고, 막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제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풍란을 바라보며 설숙은 불원간 정 노인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김개원으로부터 정 노인의 전언을 들었지만 설숙은 어쩐지 내키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다. 동삼을 보니 자연히 평사가 떠올랐고, 평사와 정 노인의 각별한 사이를 익히 아는 설숙은 어쩌면 정 노인이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평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정 노인과의 대면을 미룰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