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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회] 9부 하늘이 내린 제자 (3)

2007-04 조회 3492추천 0 프린트｜스크랩

인조 말기. 해마다 내전(內殿)으로 나전칠기와 목공예품이 진상되는 시기가 다가오면 김달수(金達修)는 초조하게 자신이 만든 물건이 궁중으로 들어가기를 학수고대했다. 지난날 명공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달수의 부친이 유명을 달리한 이후 해마다 기회는 백승직(白承直)의 수제자 유병로(柳秉路)에게 돌아갔다. 김달수의 이름은 항상 그 다음이었다. 김달수는 왜 자신이 선친의 기예를 다 물려받지 못하고 젊은 날 술과 노름으로 허송세월을 했는가 수없이 자책하였지만 이젠 영원히 그 세기(細技)를 되찾을 기회는 없었다. 김달수는 밤낮으로 원목과 더불어 몸부림쳤으나 유병로의 탁월한 기예에는 미치지 못했다. 차츰 김달수의 가슴에는 유병로를 원망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병신만 없다면 내 작품이 내전으로 진상되는 광영은 내 차지가 될 수 있을 텐데……. 유병로의 투철한 장인정신은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경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드는 법이 없었고 일이 있으나 없으나 어김없이 새벽 묘시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연장을 갈고 닦았다. 그는 한번 일에 매달리면 모든 사람과의 교류를 금했다. 정심(定心)이 흐트러진다는 것이었다. 그런저런 일로 때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집스럽고 오만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그의 천품이 더 돋보이기도 했다. 유병로가 만들어 내는 작품은 자신의 것에 비해 뭔가 모르게 달랐다. 특별히 안목이 없는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명품이었다. 겉보기에는 두 사람의 기량이 차이가 없었으나 두 사람이 만든 작품 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유병로의 작품을 택했다. 그것이 자신과 유병로의 차이였다. 유병로는 그 차이를 순(順)과 치(治)라고 했었다. 김달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작년 이맘때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행장(杏欌)을 전 공조참판 대감에게 진상했다. 대감은 그 물건을 뛰어난 명품이라 극찬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김달수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자리에 동석한 유병로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김달수의 행장을 거론했다. 「무릇 모든 명품의 가치는 얼마나 다스리는〔治〕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그 본성에 따라〔順〕 그것을 살리는가에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물건은 다스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스림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찾는 것이 순의 도리일 것이다.」 유병로의 비판에 김달수는 한 마디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 웬 선비가 유병로에게 물었다. 「무엇을 순이라 하고 무엇을 치라 하는가?」「공예의 대상인 목(木)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면 결코 치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말이오. 나무는 살아 있소. 그것을 깨칠 때 비로소 결을 보는 눈이 생기게 되오. 그 결을 생명으로 보아야 순리를 알게 되고 그제서야 겨우 나무를 안다고 할 수가 있소.」 유병로는 김달수의 선친 김문기(金文奇)와 더불어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공이었던 백승직의 후계를 이었다. 유병로가 제법 나무를 다룰 수 있을 무렵 그는 불행히도 큰 사고를 당하여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작업에 몰두하던 중 쌓아 놓은 원목이 무너져 유병로의 하반신을 덮쳐 버린 것이다. 불구가 된 후 그는 오히려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그때부터 유병로는 변했다. 온화했던 그의 성품은 차갑고 모가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솜씨는 점점 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생전에 김달수의 선친이 유병로의 작품을 보고 말했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부족한 점이 눈에 띄나 근본이 탁월하다. 가히 명공의 재목이다.」 선친의 예견대로 유병로의 나무나 자개를 다루는 솜씨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당대 제일의 장인이 되었다. 유병로는 김달수가 결코 넘지 못할 벽이었다. 김달수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등은 온통 찢어지고 긁힌 흉터 자국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유병로를 뛰어넘기 위해 평생 몸부림친 흔적이었다. 「안됐네. 올해도 역시 유병로일세.」 대전 내시의 말은 김달수를 다시금 깊은 절망에 빠뜨렸다. 사대문이 닫힌 지도 이미 오래 되었고 가끔씩 들리는 순라꾼의 딱딱이 소리는 김달수의 결단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현달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김달수는 담벼락의 어두운 그늘을 밟으며 남산골에 있는 유병로의 집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유병로의 집은 적막했다. 집안은 괴괴한 정적 속에 빠져 있었다. 얕은 싸리문 고리를 풀고 김달수는 유병로의 방 쪽으로 다가갔다. 소리없이 유병로의 방 안으로 들어선 김달수는 비수를 움켜 쥐었다. 유병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한쪽 다리가 유난히 가늘게 보였다. 김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유병로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그리고 베개로 유병로의 얼굴을 힘껏 눌렀다. 베개가 한동안 요동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옷자락으로 스물스물 배어 나오던 피가 칼을 뽑자 분수처럼 쏟아졌다. 김달수는 미친 듯이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유병로의 죽음은 장안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살해의 수법이 치밀하고 대담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그가 당대 제일의 명공이었기 때문에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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