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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회] 7부 구한말의 대국수 (7)

2007-04 조회 3573추천 0 프린트｜스크랩

다음날 아침 원세개의 사저로 귀가한 여목은 원세개에게 면담을 청하였다. 여목의 면담 요청은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여목과 석정이 원세개를 방문했을 때 원세개는 권총 한 자루를 쥐고 닦고 있었다. 육혈포는 익히 보아 왔지만 권총은 처음 대하는 여목이, 「대인,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원세개는 자랑스럽게 권총을 흔들었다. 「이것 말인가? 영국어로 피스톨이라고 하는 것이네. 손 안에 들어오는 총이라 하여 수총(手銃)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최신식 육 연발이며 파괴력도 대단하지. 명중률도 높고…… 일전에 미국 영사를 만났을 때 부탁하여 몇 자루 구입하였다네. 거금을 들였지.」 여목이 원세개가 닦고 있는 권총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래, 어제 상관숭과 대국을 하였다고? 결과는 어찌 되었나?」「어르신이 불계승하였습니다.」 옆에서 석정이 대신 대답하였다. 원세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숭을 이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가는 중국의 바둑이 여목 자네의 손에 쑥밭으로 변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죄송합니다, 대인.」「승패는 천명(天命)이다. 그게 어찌 죄송한 일인가. 모처럼 대국수에게 바둑이나 한 판 배우세.」 그 말과 함께 원세개는 바둑판 앞으로 갔다. 여목이 마주 앉자 원세개는 흑돌을 넉 점 깔았다. 바둑은 초속기로 진행되었다. 원세개는 그 급한 성격만큼 생각을 싫어하는 속기형이었다. 그러나 승부처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장고에 빠져 깊은 수읽기를 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날 보자 했었다고?」「예, 대인.」「말해 보게.」「여기 있는 석정과 함께 여행을 좀 다녀왔으면 합니다.」「틀림없이 바둑이 목적인 여행이렷다?」「그러합니다.」「그래 목적지는 어딘가?」「일단은 남경으로 정했습니다만…… 천천히 남하하려고 생각중입니다.」「그것도 좋겠지. 석정과 함께 여행을 한다고?」「그렇습니다.」「석정은 내 식솔이 아니니 굳이 나에게 허락을 얻을 필요는 없고, 보아하니 두 사람 사이가 각별해진 것 같군. 내가 잘못 보았나, 석정?」 석정은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중국 기계의 봉황이 드디어 나래를 접고 둥지를 틀었군. 부끄러워할 것 없다, 석정. 여목과 같은 사람을 만나 사모의 정을 느끼지 못하면 그 또한 여자가 아니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바둑이 끝났다. 여목의 불계승이었다. 원세개는 쓴 입맛을 다셨다. 「자네는 한 번도 봐 주는 예가 없군. 여기 온 이래 약 스무 판을 두었는데 한 번도 이기지 못하다니.」「죄송합니다, 대인.」「별 소릴. 내가 자네보다 수가 약해서인데. 내 자네에게 바둑도 배웠고, 떠나는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주겠네.」 그 말과 함께 원세개는 서랍 쪽으로 가더니 예의 권총과 실탄 한 꾸러미를 여목에게 내주었다. 여목이 원세개가 건넨 육혈포를 받아 들었다. 「대인, 이것은 매우 비싼 것 같은데…… 사양하겠습니다. 더구나 기객에게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아닐세, 필요할 것이야. 지금의 청조는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네. 더욱이 황제는 너무나 어리고, 곳곳에서 청조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어서고 있으니 지금의 중국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곳이네. 여행을 하다 보면 위험한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네. 그리고 이제 자네도 한복을 벗고 우리 복식으로 갈아입고 길을 떠나야 할 것이야.」「고맙습니다. 대인.」 참으로 세심한 원세개의 배려였다. 비록 타인의 눈에는 욕심이 많고 교활하며 심술궂은 두꺼비로 비춰진 원세개였지만 여목에 대해서 만큼은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었다. 원세개의 사저에서 며칠을 더 머문 여목은 홀가분한 심정으로 석정과 함께 길을 나섰다. 8부. 대륙에 불어닥친 피바람 중국 대륙에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조선에서 온 한 이름 없는 기객이 북경에서 출발하여 낙양에 당도하기까지 6개월여 동안 대륙을 종단하면서 대륙의 바둑을 무인지경으로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북경의 일인자 상관숭을 필두로 천진(天津)의 이휘백(李輝柏)이 불계로 날아가고, 제남(濟南)의 호랑이 방인목(方仁牧)이 분루를 삼켰다. 산동성(山東省) 청조(靑鳥)에 칩거하여 평생을 산동성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 본 적이 없고, 흑을 쥐고는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는 집흑 불패의 신화로 불리던 하림(河林)이 집흑으로 생애 처음으로 패배를 당하자 중국 기계는 숨죽여 여목의 다음 행보를 주시했다. 조선을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속방 정도로만 여겨 언제나 조선을 한 수 아래로 치부했던 중화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서주(徐州)의 왕일봉(王日峯), 감각이 뛰어나고 속기에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일컬어진 그는 여목에게 자신의 장기인 속기로 대국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초속기로 벌어진 두 사람의 대국에서 흑을 쥔 왕일봉은 중앙 대접전에서 대마가 몰사하는 일생일대의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 대국을 관전한 석정은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손에 돌을 쥐고 마치 누가 빨리 착점할 수 있느냐 시합을 하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상대편의 돌이 미처 손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반상 위에 손이 올라가곤 하였다. 그렇게 빨리 두고도 정확한 수읽기와 포석 감각 등은 단연 일품이었다. 승패를 떠나 두 사람의 감각은 실로 신기에 가까웠다.」 대륙의 고수들은 자신들의 패배엔 아랑곳없이 여목의 다음 행보의 귀추를 주목했다. 여목의 다음 상대는 누구나 인정하는 중국 제일의 국수 위지손이었기 때문이다. 여목과 석정이 남경(南京)에 당도했을 때는 팔월 중순이었다.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푼 여목과 석정은 곧바로 위지손을 찾아갔다. 위지손은 여목에 비해 예닐곱 연상으로 50대 초반의 옥골선풍이었다. 여목이 상관숭으로부터 받은 소개서를 건네 주었다. 위지손은 밀봉된 봉투를 뜯어서 서신의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한참을 묵묵히 생각하더니 편지를 서랍 속에 보관하였다. 「먼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도리상으로 보아 당장 지금이라도 대국을 하는 것이 가할 것이나…… 며칠 전부터 미리 예정된 약속이 있어서 대국은 사흘 후로 미루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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