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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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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31회] 7부 구한말의 대국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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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목의 말에 원세개의 안색이 조금 경직된다. 「몰라서 묻는가? 기나긴 승부에 있어 판세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데도 불구하고 조급히 승부를 건다면 어찌 되겠는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승부수를 띄우는 것과 같은데, 잠시 참아 두면 스스로 제풀에 허물어지고 당당하게 입성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데 굳이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겠는가.」 「…….」 「오늘은 긴 여정에 피곤할 테니 그만 쉬도록 하지.」 원세개는 이내 연회를 파했다. 그리고 다음날 원세개는 여목을 빈청으로 불렀다. 여목이 빈청으로 들어서 보니 원세개는 한 여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원세개는 호색가로 소문 난 사람이었다. 그는 집안에 열 명의 첩을 두고도 부족해 걸핏하면 외부의 여인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곤 하였다. 여목은 잠시 망설였다. 여인이 원세개의 여자든 아니든간에 함부로 마주 앉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예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원세개가 여목을 발견하고 반갑게 맞았다. 「오! 여목, 어서 오게」 「찾아 계셨습니까, 대인.」 청영을 들락거리며 배운 여목의 중국어 실력은 의사 소통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여목이 자리를 잡고 앉자 원세개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시켰다. 「여목은 내가 조선에서 13년간 주둔해 있을 때 사귄 바둑의 대가다. 그리고 이 여자는 왕석정(王石精)이라고 근래 사귄 기우네. 내가 석 점을 놓고 두는 처지라네.」 원세개의 기력을 익히 아는 여목은 놀란 얼굴로 왕석정이라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물 대여섯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그리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아주 맑고 총명한 눈을 가졌고 은은한 자태가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여목,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석정과 바둑을 두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네. 내가 본국으로 돌아올 당시에 자네에게 넉 점의 치수로 두었으나……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 보건대, 석정, 일단 자네가 정선(定先)으로 두어야 할 것이다.」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한 조선 기객의 바둑 대장정은 왕석정이란 여류 기사를 상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여목은 잠시 눈을 감았다. 비록 역사에 남을 공식대국은 아니지만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그 나라의 이름 난 기사를 상대하는 이상 이 바둑은 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대국이었다. 그것은 비단 여목에게 있어서뿐 아니라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투지를 불태우는 왕석정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딱’소리와 함께 여목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여목의 눈에는 서슬 푸른 기운이 조금씩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여목의 정기(精氣)였으며 신기(神氣)였다. 여자와의 대국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막연히 여자의 바둑이기 때문에 온건하게 두리라 생각했던 여목은 금세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석정의 바둑은 힘이 넘쳤으며 대륙여인의 기질답게 넓은 기풍이었다. 거기다가 매우 전투적이었다. 〔편집자 주: 중국식 바둑은 사 귀의 양 화점에 대각선으로 각기 두 점씩 놓고 백의 선수(先手)로 시작한다. 흑을 상수로 취급하는 전통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흑, 백을 바꾸어 기술하였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착오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20여 수 만에 반상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여목이 우하귀 흑의 기둥 말을 젖혔다. 왕석정은 30여 분을 장고하더니 과감하게 백을 끊어 왔다. 강수였다. 백에게 실리를 주더라도 완전히 봉쇄해서 두터운 세력을 구하는 수였다. 이번에는 여목 쪽에서 장고에 들어갔다. 어떠한 변화가 있어도 자신이 실리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흑의 봉쇄를 피할 수 없었다. 여목의 머리 속에서 여러 형태의 참고도가 그려졌다가는 지워지고 또다시 그려졌다. 중앙으로의 봉쇄는 기세상 허용할 수 없었다. 여목은 과감히 실리를 포기했다. 옆에서 구경하는 원세개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자기라면 일단 봉쇄를 당한다 하더라도 귀의 실리를 챙긴 후에 점진적으로 삭감해 들어가고 싶었다. 80여 수가 지났다. 원세개가 보기에는 백의 비세였다. 그때 여목의 승부수가 비수처럼 반상에 꽂혔다. 움츠려 있던 날개를 펄럭이며 상변에서 중앙을 향한 흑의 미생마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흑을 쥔 석정의 아리따운 손이 주춤했다. 계속해서 여목의 무거운 손길이 반상 위를 눌러 왔다. 석정은 고개를 들어 여목을 바라보았다. 바둑판 앞에 앉아 있는 여목의 모습에서 고고한 예인의 품격과 대인의 풍모가 엿보인다. 여목의 손이 종횡무진 반상 위를 누볐다. 여목의 손은 단순한 기객의 손이 아니었다. 석정이 느끼기에 여목의 수는 평범을 넘어선 것이었다. 마침내 앞서 가던 흑의 바둑은 뒤집어졌고 석정은 담담한 표정으로 돌을 거두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석정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한 판이었다. 말 한 마디 없이 반면을 들여다보고만 있던 원세개가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참으로 명국이었다. 승부에 관계 없이 서로가 최선을 다해 둔 한 판이었다. 특히 중반 이후의 여목의 바둑은 참으로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가히 천하를 놓고 다투는 영웅들의 전장과 진배없었다. 진정한 대가들의 바둑이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 한 판이었다. 또한 나에게 고수들의 바둑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진정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원세개는 두 사람의 바둑에 대해 극찬하였다. 그러나 그 바둑 한 판이 조선의 이름 없는 기객으로서 드넓은 중국 땅을 향하여 던진, 미완성으로 그친 대장정의 거보 중 그 첫걸음이 되리라고는 원세개도 석정도 그리고 여목 자신도 알지 못했다. 석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여목을 바라보았다. 대국에 임했을 때의 투철했던 승부사의 모습은 간 데 없고 그의 모습은 평화롭고 온순한 선비의 기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석정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 갔다. 한 달 반 동안 벌어진 여목과 석정의 바둑은 석정의 완패였다. 다섯 판을 두어 네 판을 불계패당하고 한 판은 두 집을 패했다. 석정은 자신의 패배에 불만이 없었다. 여목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석정이 잠을 못 이루는 것은 패배에 대한 불만이나 패배의 참담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투철한 승부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한 달 반 동안 겪어 온 여목에 대한 인간적인 사모였다. 비록 여목의 나이가 40대 중반의 장년이었지만 나이에 상관 없이 끓어오르는 사모의 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목의 수려한 용모와 오랜 수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탈속한 기품은 석정에게 오랫동안 잊어 왔던 남자를 일깨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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