꾼의 착각 (1)

선비만석

  퇴근 시간 이후의 바둑 한 판을 두는 것이 김 과장의 요즈음 취미생활 이였다. 바둑 실력은 기원바둑으로 겨우 약한3급 취급을 받는 그였지만, 업무의 스트레스를 요즘 들어 기원에서 푸는 일이 반복 되다보니, 어느새 만방기원의 단골손님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김 과장은 낙하산 젊은 부장의 잔소릴 실컷 듣고서, 결국 밤 아홉시가 다 되어서 퇴근을 하여 기원문을 들어섰다.

  “어 김 과장님 오늘은 늦으셨네......”

정육점 박 사장이 기원문을 들어서는 그를 보면서 반색을 하며 말을 건다.

  “아.......예. 오늘은 좀 늦었네요......”

  “허허.......거 낙하산 부장에게 닦달을 당하셨나 왜 그리 풀이 없으셔......” 

  “매일 그렇죠 뭐....... 하지만 머 별거 아닙니다.”

  김 과장은 그렇게 얼버무리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요즘 들어 기원에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바둑을 두다가 한잔 술까지 걸치다 보면, 자정이 훨씬 넘어서는 그의 귀가 시간 때문에, 마누라의 잔소리가 부쩍 늘었지만 야근을 핑계로 얼버무린다. 정육점 박 사장은 마음속으로 기회다 싶었다. 박 사장의 기력은 말은 5급이지만 약한 3급에게는 호선으로도 버티는 말하자면 전형적인 방내기 꾼 이였다. 요즈음 김 과장의 주머니를 털어버릴 기회를 틈틈이 노리고 있었으나 김 과장이 워낙 박 사장의 그런 실체를 들어서 아는 터라 대국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 과장은 속으로 다짐했다. 저놈의 너구리같은 박 사장이 도전을 해온다면 젊은 부장 놈을 박살을 내듯이 그렇게 화풀이를 할 셈 이였다.

  “김 과장님, 오늘 소주 내기 한판 어때?”

  드디어 박 사장이 도전장을 던졌다. 김 과장은 박 사장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 감전되는 듯한 묘한 흥분을 느꼈다. 마치 기다리던 첫 사랑 여자의 입술을 훔치는 듯한 기분 이였다. 하지만 문제는 치수였다. 박 사장의 실력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박 사장은 한사코 5급으로 두려고 하기에, 어떤 때는 대국자와 실랑이를 많이 벌리는 조금은 치사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 순순히 치수를 맞추어 줄지 그것이 의문 이였다.

“그러지요 뭐.......한데 박 사장님 바둑이 워낙 세어서 제가 되려나 모르겠네요.......호선으로도 제가 좀 꿀릴 것 같은데......”

  김 과장은 선수를 쳤다. 두 점으로 두자고 할 것이 뻔한데 두 점을 접고는 바둑이 판이 짜일 리가 없는 것을 뻔히 알고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니 3급이 5급에게 호선으로 두자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남....... 김 과장 바둑이야 강 3급인데......”

  역시 내기 꾼 이였다. 치수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려는 조금은 치사한 방내기 꾼의 전형적인 술수.........

  “아니 박 사장님이 5급이면 저는 6급을 두어야 맞습니다. 저번에도 3급을 둔다는 사람을 정선까지 만들어 망신을 주시더니 저한테 까지 그럴 생각이세요?”

  “거참........그 때야 그 양반이 워낙 꽃 바둑 3급이라서 그런 거지.......”

  “저랑은 그냥 호선으로 두시죠. 급수도 3급으로 올리시고요.”

  “내참........내가 이 기원에서 5급 두는 거야 이 동네 사람은 다 아는데.......”

  “박 사장님 바둑이 5급이 아니 란걸 다 알고 계시죠.........급수 낮추고 두시니 동네 사람들은 안 두어 두시잖아요. 제가 선에다 고미를 세게는 받아야 판이 짜일 텐데.....안 그래요?  원장님!!”

  김 과장은 내친김에 박 사장의 기분을 붕 띠우면서 원장에게 응원을 청했다.

  “허허........김 과장님 말씀이 지당하시지요........ 박 사장님 때문에 우리 기원 손님이 자꾸 줄어드니 이제 치수를 올리세요. 강 3급을 두어도 손색이 없으신데......”

  원장은 김 과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원장의 한 마디에 결국 박 사장은 김 과장과 호선으로 방내기를 하게 되었다. 기본 이만 원에 한방에 만원씩으로 판을 정한뒤, 그들은 다섯 판만 두기로 하였다. 대국시간은 각자30분에 초읽기 1분 3회로 정하고, 아예 초시계까지 비치하고는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세 판만 이기기로 하였다. 첫판과 두 번째 판은 한방 이내로 져주는 것으로 하여, 박 사장이 자신을 우습게 알도록 하고, 나머지 세 판중에 세 번째 판을 많이 이겨 박 사장을 흥분시킨 다음, 그대로 밀고나가 만방으로 최종판을 이긴다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김 과장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첫판부터 박 사장은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고 싶었는지, 강수 일변으로 두어 왔다. 그런 박 사장의 날카로운 창끝을 슬쩍슬쩍 비켜가면서, 김 과장은 첫판을 흑번으로 반면 두 집을 남겼다. 4호반을 이긴 박 사장의 얼굴은 우월감에 도취되어, 연신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