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부족하다. 그리고 길이…… 멀다.

동삼은 가슴이 답답했다. 최해수와의 복기 과정에서 검토되었던 바였지만 중반을 넘어서까지 최소한 다섯 집 이상 유리했던 바둑이 막판 끝내기에서 몇 차례 당한 끝에 결국 승부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복잡한 변화를 피해 한 발 물러선 동삼의 착수를 최해수가 지적했다.

「이 수가 문제였어. 패가 날 수도 있지만 과감하게 막아야 할 자리였어.」

예리한 지적이었다.

최해수는 동삼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막는다고 이긴다는 보장은 없소.」

동삼은 심사가 뒤틀린다. 맏형격인 최해수를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괜히 그래 본다.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닐세.」

「그럼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오?」

「너무 자기의 틀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네.」

동삼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바둑에 있어 기풍이란 게 존재할 이유가 없잖소.」

「자기류의 바둑은 필요하지. 다만…….」

「다만 뭐란 말씀이오?」

「지금은 승부보다 기량 연마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네.」

「…….」

「변화를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일세.」

동삼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승부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그런 식으로 물러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져서 기분 좋은 사람은 없소.」

동삼은 끝까지 심술을 부렸고 최해수는 쓰게 웃었다. 말은 그랬지만 동삼은 최해수의 말을 수긍했다. 승부보다는 기량 연마가 필요하다는 최해수의 지적은 정곡을 찔렀다.

수원을 떠나 인사동 정 역관 집으로 가던 도중 아버지는 안양 못 미쳐 어느 객주집에서 어떤 사람을 상대로 넉 점을 접고 바둑을 한 판 두었다.

그날 동삼은 아버지가 틀림없이 지는 줄 알았다. 아버지의 말이 도처에서 죽었다. 그런데 종국 후 계가를 해 보니 아버지가 석 집인가 넉 집인가 이겨 있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바둑을 진 상대는 기가 막혀 집수를 세어 보고 또 세어 봤다.

그날 밤 아버지가 말했다.

「한 판의 바둑에서 승부의 기회는 한 번 아니면 두 번이다. 그때 판을 결정 짓지 못하면 승부사가 될 수 없다. 판을 결정하는 힘은 수읽기와 형세 판단이다.」

아버지의 입에서 진한 술냄새가 났다.

「……승부사는 결코 감각에 의존해선 안 된다…… 함부로 승부를 포기해선 더욱 안 된다.」

동삼은 그때의 아버지의 말을 되새겨 본다.

판을 결정하는 힘…… 감각에 의존하지 말아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가슴으로는 와 닿는데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갑자기 몰아친 철 이른 한풍으로 문고리가 덜그덕거리며 흔들린다. 사흘 후면 한가위다. 대부분 문하생들은 추석을 지내러 집으로 갔고 도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오갈 데 없는 최해수와 유민재 그리고 동삼이었다.

마당에 우뚝 선 키 큰 나무가 바람에 우수수 떤다. 동삼은 방문을 열었다. 찬 공기로 실내가 금방 서늘해진다.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동삼은 툇마루를 내려와 마당 한중간으로 나갔다. 금세 한기가 몸 구석구석 파고든다. 사위는 적막했고 이미 최해수와 유민재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문하생들이 없는 탓인지 오늘따라 도장이 휑뎅그렁하게 느껴진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열일곱이 되는데…… 그토록 죽기살기로 바둑에 매달렸건만 1년이 다 되도록 답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니…… 어느 세월에…… 갈 길은 멀건만……. 바둑은 여전히 그 오묘한 수의 경지를 보여 주지 않는다.

동삼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보름이 가까워서인지 하늘은 밝다. 한 줄기 뭉게구름이 가지 끝에 걸려 있다. 외따로 떨어진 구름이 멀고 먼 세월 같다.

「무얼 하느냐.」

스승이었다. 달빛 아래서 스승이 제자를 쳐다본다. 말이 사제지간이지 평생 말 한 마디 주고받는 법이 없는 스승과 제자였다.

설숙은 오후에 원주에서 올라온 한 기객을 통해 자운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제 선대 여목 스승의 시대가 자운 선생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평생을 부운처럼 떠돌다가 만년엔 금강산에 묻혀서 노승들과 더불어 바둑으로 여생을 보냈다는 자운 선생. 향년 74세로 천수를 누렸다 하나 왠지 자운 선생의 죽음은 남다른 감회로 설숙의 마음을 고적하게 했다. 평사가 내쫓긴 이유가 마치 자신에게 있는 양 한탄했던 자운 선생은 경성에 들르면서도 거의 도장을 찾지 않았다.

어디선가 푸른 달빛을 가르고 자운 선생의 대금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한풍이 설숙의 적삼자락을 휘몰고 지나간다. 동삼의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지난 7년 세월 단 한 번도 곁을 주지 않던 스승이었다. 스승은 완강했다. 자애롭기보다는 엄했고 격려하기보다는 제자들을 꾸짖었다.

「시간이 늦질 않았느냐.」

스승의 얼굴이 전에 없이 적적하다.

동삼은 여러 차례 스승에게 다가가고자 열망했으나 막상 스승 앞에 서면 중압감에 눌려 전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공부에 진척이 없습니다.」

동삼이 큰마음 먹고 어렵사리 속을 털어놓는다.

「성정이 메마르면 매사 그릇되기 십상이니라.」

뜻밖에 설숙의 어세가 부드럽다. 동삼이 몸둘 바를 모른다. 설숙이 안채로 향한다.

「밤바람이 차가우니 들어가거라.」

설숙의 차분한 음성이 허공에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