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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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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49회] 11부 파문당하는 제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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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사는 종로에서 만물상을 경영하는 인사동 정 역관(驛官)의 집에 가서 종종 바둑을 두었다. 정 역관의 사랑채엔 상당한 실력을 갖춘 바둑 고수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내기바둑을 두는 사람들이었다. 여목이 내기바둑은 위기정신에 어긋난다 하여 그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과 바둑을 두는 것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평사가 겪어 보기에 내기바둑을 두는 사람은 비록 자신보다 두어 수 아래이긴 하였지만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의 바둑은 실전적이며 끈질기고, 암수가 많은 바둑이었다. 어지간히 불리해도 결코 돌을 던지는 법이 없고 실낱 같은 허점도 여지없이 파고드는 승부사의 기질이 돋보였다. 평사는 나름대로 그들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어두운 얼굴 뒤에는 승부로 살아온 그들만의 고통이 숨어 있었다. 평사를 고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천한 노비의 자식이라는 피의 명제였다. 얼마 전, 평생을 종으로 살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대부분이 양반의 후예들인 동문들보다 차라리 그들에게 평사는 묘한 동지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평사가 자리에 앉자 정 역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요즘 항간의 소식을 들어 알고 있겠지.」 「…….」 「큰일이야. 일본서 건너온 두 전문기사 때문에 조만간 조선의 바둑이 쑥밭으로 변하게 생겼네.」 평사는 벽에 걸린 족자를 바라본다. 「국수급으로 평판이 자자하던 성병국, 윤경문, 노사초, 안익수까지 파죽지세로 무너졌다더군.」 족자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는 글자가 주먹만하게 박혀 있다. 「그뿐이 아닐세. 학골(鶴谷) 선기재(善棋齋)에 기거하던 우석(愚石)선생까지 바둑에 지고 식음을 전폐하며 두문불출 하고 있다네. 수학하던 제자들이 찾아가도 만날 수가 없다네.」 우석은 대단한 기력의 소유자였다. 본명이 김수익(金守益)이고 전남 영광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명인의 반열에 올라 젊은 시절엔 세상을 떠돌며 방랑기객으로써 숱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었다. 어찌보면 여목과 더불어 조선바둑을 양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어떵게 된 것이 일본기사들에게만 걸리면 우리국수들이 사족을 못 쓰네 우석선생도 가고 사초도 가고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일쎄.」 구한말에 최초로 조선을 다녀간 기사는 응금준일(應金準一)이었다. 응금은 21세 본인방(本因坊)수재(秀哉)명인과 쌍벽을 이루었던 일본바둑계의 거목이었다. 정치인 이등박문(伊藤博文)과도 친교가 두터워 조선에 오면 이등의 저택에 기거를 하곤했다. 응금이 조선을 대표하는 백남규(白南圭) 국수와 겨루어 전승을 하자 많은 기객들이 응금에게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하나같이 응금을 이길 수가 없었다.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출신의 양일파(梁一波)국수가 절치부심 응금에게 일전불사로 승부를 결했으나 응금에게 형편없이 지고는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 얼마 후 일파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임종시 일파의 마지막 말은 녹일! 녹일! 이었다. 녹일(綠一)은 앞록강 이남에서 바둑이 제일 세다는 뜻의 타계한 김만수(金萬壽)의 국수의 아호였다. 김만수 국수는 명실공히 조선을 통틀어 제일 센 바둑이었다. 그의 전성기 때 확실치는 않으나 일본으로 건너가 본인방 수에이(秀(榮)와 2대2로 비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일파가 녹일을 찾으며 죽은 것은 녹일이 살아있었으면 조선바둑이 이렇게 까지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터인데 라는 것이었다. 입을 닫고 있는 평사에게 정 역관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은근히 물었다. 「여목 선생께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시지는 않겠지?」 「…….」 「모르고 계신단 말인가?」 「알고 계십니다.」 「무어라 말씀하시던가?」 「스승께서는 그들과의 대국을 금하셨습니다.」 정 역관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들과의 대국을 금하셨다고? 이유가 뭔가?」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왜놈들은 조선에서 바둑의 도를 일깨우는 게 아니고 승부만 탐할 뿐이니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공공연하게 돈이나 전답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정 역관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다. 「나야 단순한 바둑 애호가에 지나지 않아 바둑의 깊은 도는 잘 모르지만 현 조선 바둑은 왜놈들에게 엄청난 수난을 겪고 있지 않는가. 기도정신도 중요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네.」 「…….」 「여목 선생께선 이제 연로하셨으니 직접 나서기가 뭐할 테고 자네나 설숙이라도 그들을 상대해야 할 게 아닌가. 요즈음 그놈들은 공공연하게 현대 바둑의 종주(宗主)는 일본이라 하며 큰소리들을 치고 있네. 어쨌든 자네 사정은 알겠네.」 평사는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안에는 작설차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도장으로 가는 밤길은 그날따라 어둠이 짙었다. 평사는 고고한 스승의 모습을 떠올린다. 얼마 전 스승은 안채로 평사를 불렀다. 「네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7년이 지났습니다.」 「아비의 나이를 아느냐?」 「쉰이 넘었습니다.」 「네 아비가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 「생사의 이치는 불변이다. 종신(終身)을 못한 것이 안타까울 것이나 효란 마음에 있다. 원효대사가 말하길 마음속에 자신보다 부모가 먼저 있으면 그것이 효라 했다.」 「…….」 「너의 마음속에 아비가 있으면 네 아비는 죽은 것이 아니다.」 평사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다. 「마음을 굳게 먹고 더욱 용맹정진하여 기도 연마에 매진하도록 하여라.」 평사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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