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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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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41회] 9부 하늘이 내린 제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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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의 기보는 남은 것이 없습니까?」 박 화백이 감회에 젖어 해봉처사에게 물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발걸음을 이곳까지 끌고 온 것도 한 장의 기보 때문이 아닌가. 「없네. 그 옛날 설숙 스승께서 두 장의 기보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더군. 한 장이 바로 위지손 선생과의 대국이었는데 설숙 스승께선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네. ‘내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실전에 임하여 이런 신수를 두어 볼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일본 바둑사에 불멸의 기성으로 불리는 슈사쿠(秀策)가 둔 이적지수(耳赤之手)를 고금의 묘수라고 칭송하지만, 여목 대스승과 위지손 국수의 대국에서 대스승의 마지막 한 수는 가히 무형지수(無形之手)라 할 만한 것이지.」 슈사쿠는 일본 바둑사에 있어서 도사쿠(道策), 오청원(吳淸源)과 더불어 영원한 기성(碁聖)으로 불리던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슈사쿠는 돌이 갓 지났을 무렵 자주 칭얼거리고 떼를 쓰며 울었다. 하루는 슈사쿠의 어머니가 참다 못해 버릇을 가르친다고 슈사쿠를 벽장 속에 가두었다. 그런데 벽장 속에 가둔 후 신기하게도 울음소리가 그치고 조용해졌다. 어머니가 놀라 벽장을 열어 보니 슈사쿠는 벽장 속에서 혼자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놓으며 놀고 있었다고 한다. 슈사쿠가 4단 시절, 당시 일본 바둑의 풍운아 겐낭 인세키(幻庵因碩) 8단과의 대국 때였다. 4단과 8단과의 대국은 원칙적으로 두 점 바둑이었으나 겐낭이 스스로 슈사쿠의 선(先)을 자청하여 대국하였다. 슈사쿠는 필승의 신념으로 맞섰지만 바둑은 어느덧 선착의 효를 잃고 겐낭에게 밀리게 되었다. 바둑은 누가 보아도 겐낭의 우세가 확실한 듯이 느껴졌다. 그때 고금의 묘수가 반상 위에 등장했다. 후세 사람들이 불멸의 묘수라고 지칭하는 이적의 수였다. 이적의 수란 그 수를 본 겐낭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귀가 점점 빨개졌다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결국 이적지수는 국면을 백의 절대 우세에서 형세 불명으로 만들었고 계가 결과 흑이 3목을 남겨 슈사쿠의 승리로 이끌었다. 해봉처사가 여목 대스승의 수를 무형지수라 한 이유는 그 수의 형상(形相)이 없는 데 연유한 것이었다. 「두 번째 기보는 어떤 것입니까?」 「그 기보는 대스승이 중국을 떠돌면서 제남의 국수 방인목과 둔 대국이었네. 실리 바둑과 대륙적인 세력 바둑의 피 나는 대결을 극명하게 보여 준 대국으로 중반까지 불리했던 바둑을 극적으로 뒤집은 명국으로 평가되었네. 아쉽게도 이 두 기보는 설숙 스승의 타계와 더불어 소실되었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박 화백은 선대의 거인 여목을 떠올리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그것은 기이하다고 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소담(素潭)의 사랑채에 가끔씩 유하는, 기인으로 소문 난 박 선달과 더벅머리 소년이 사랑채 앞 양지 바른 평상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이 바둑을 두는 게 아닌 이상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 소년이 소담댁에 대대로 내려온 노비의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허허, 그 참！ 바둑이 재미있게 돼 가는걸.」 박 선달은 혀를 끌끌 차고 소년은 바둑판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여목이 사랑채로 올라가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두 사람의 바둑은 겨우 초보 단계를 벗어난 수준이었다. 소년은 옆에 누가 다가와 있는지도 모르고 수를 읽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여목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각진 턱과 깊고 고집스런 눈매가 여목의 시선에 잡혔다. 여목은 이제껏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소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좋은 눈을 가졌구나. 참으로 보기 드문 승부사의 눈이 아닌가……. 사랑채에는 봉화, 영양 일대에서 손꼽히는 고수로 소문 난 윤 진사가 여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 진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몇 년 전 여목이 이곳에 들렀을 때 그는 여목과 몇 번 대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여목과 같은 고수에게 한두 판 배우는 것을 평생 영광으로 아는 애기가였다. 「웬 아이가 바둑을 두고 있더군요.」 여목의 말에 윤 진사가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아니, 저 애는！」 윤 진사의 얼굴에 노기가 서린다. 「감히 상것이！」 「그냥 두시지요.」 「변고로고.」 「바둑에 반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목은 두루마기를 벗어 벽에 걸었다. 잠시 후 소년이 바둑판을 들고 들어왔다. 여목에게 윤 진사는 넉 점을 놓았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바둑이 진행되었다. 100여 수가 넘어가자 윤 진사의 좌변 흑대마가 몰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여목의 눈에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때까지 소년은 나가지 않고 바둑판에서 몇 발짝 떨어져 반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이…… 역시 좋은 눈이구나……. 그런데 바둑을 모르는 아이가 무얼 저리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인가. 소년은 여목의 눈을 의식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다. 여목의 눈길이 소년의 뒷모습에 잠시 머물렀다. 밤이 깊도록 여러 가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여목은 방을 나왔다. 서늘한 야기가 얇은 홑적삼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왔다. 여목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어깨를 폈다. 그리고 완만한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서늘하던 밤바람도 이내 시원하게 느껴졌다. 여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 조선의 운명도 이 밤하늘처럼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저 수많은 별들처럼 무수한 조선의 인재들이 살아 있는 한, 그 인재들이 새로운 조선에 밑거름이 된다면 이 암울한 시대는 스스로 물러가고야 말리라. 나 또한 기꺼이 그 밑거름이 되리라. 기꺼이……. 어디선가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려 왔다. 행랑채 뒤쪽 후미진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목은 성큼 방 앞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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