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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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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39회] 8부 대륙에 불어닥친 피바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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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 후 여목과 석정이 위지손을 방문했을 때 위지손은 두 사람의 참관인과 함께 여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몰락한 명조 황실의 후손이었고 또 한 사람은 남경에서 손꼽히는 거상의 아들로서 두 사람 모두 대단한 바둑 애호가라 했다. 돌을 가린 후 흑을 쥔 위지손이 반상 위에 첫 수를 놓자 마침내 조선의 국수 여목과 대륙의 명인 위지손 사이에 절체절명의 대결이 시작됐다. 위지손은 대륙과 같은 두터운 기풍에다 날카로움까지 겸비한 자였다. 중국이란 대륙은 묘한 나라다. 수천 년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어떤 국가도 중국이란 나라를 완벽하게 지배하지 못했다. 그들은 외세가 침입하면 일단 그 세력을 대륙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치고 빠지고 물러섬으로써 단순히 군대와 군대와의 싸움이 아닌 군대와 대륙의 싸움으로 몰아 갔다. 외세는 스스로 지리멸렬하여 무릎을 꿇었다. 항거할 수 없는 세력에 대해서는 땅은 지배하게 하되 그 정신은 중국 사람이 지배하였다. 원(元)이나 청(淸)의 지배 세력은 땅만 지배할 뿐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국의 지배를 당하였다. 대부분의 중국인은 왕조의 부침(浮沈)에 초연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지닌 탐관오리가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겨 간 것 외에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내하고 기다렸다. 역사는 영원히 어느 한편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둑은 신중하게 전개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기량을 존중하여 바둑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모양을 갖추어 나갔다. 위지손이 다가가면 여목이 물러섰고 여목이 다가가면 위지손이 물러섰다. 인내엔 인내로 전투엔 전투로 서로를 탐색했다. 요석(要石:상대의 돌들을 끊고 있는 기둥말)과 폐석(廢石:단순히 집의 가치만 있을 뿐 전략적 가치가 전혀 없는 돌)의 구별이 엄격했고 세력과 실리의 배합이 적절했다. 바둑은 물 흐르듯이 흐른다. 승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다. 과연 위지손은 중국 최고의 고수로서 손색이 없었다. 60여 수에 이르러 위지손의 한 수가 반상 위에 떨어졌다. 여목으로서는 처음 보는 수였다. 운석(運石)의 상(相)을 보면 그 수는 정형(正形)이 아니다. 행마의 형태가 기리(棋理)를 벗어났다. 허나 상대는 중원의 기객 위지손이 아닌가. 여목은 생각에 잠긴다. 피할 것인가 되받아 칠 것인가. 피하면 집이 상하고 받아 치면 국면이 어지러워진다. 위지손의 행마가 이치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그 나름대로 사고가 있다. 어찌 보면 그 수는 위지손가(家)의 비기(秘技)일 수도 있다. 여목은 위지손의 비수를 다각도로 분석해 본다. 길은 두 가지다. 인내할 것인가, 추궁할 것인가. 응징하면 앞으로 일어날 천태만상의 무궁무진한 변화를 다 헤아릴 수는 없는 일, 결국 실전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비켜 가면 그것으로 승부는 길어지나 집의 균형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균열은 경우에 따라 승부와 직결될 수도 있다. 승부란 찰나에 일어난다. 티끌과 같은 무명(無明)이 일생을 번뇌에 빠뜨린다. 반대로 그 무명을 매개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도 있다. 선악의 윤곽이 확실치 않고 결론에 도달하기도 전에 여목의 혜안이 흐려진다. 돌과 돌이 부딪치면 소리가 나고 기와 기의 대립은 필연적이다. 여목은 호흡을 가다듬고 단전에 힘을 준다. 차라리 흘러가고 싶다. 물처럼 바람처럼 지나가 버리고 싶다. 세상을 희롱하고 유유자적하고 싶다. 마침내 여목은 깨닫는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때가 아니라고. 여목은 옆으로 비켜선다. 위지손이 유유히 다음 수를 착수했다. 아침 나절에 시작한 바둑은 벌써 술시를 지나고 있었다. 작은 소요가 끝난 뒤 바둑은 초반을 지나 중반을 향한다. 방 안에 달아 놓은 유등 주위로 몇 마리 나방이 몰려든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어떨는지요.」 위지손이 봉수를 제의했다. 여목은 선선히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위지손측에서 마련해 준 숙소를 사양하고 여목은 석정과 함께 마차를 타고 미리 정해 놓은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사흘 후 대국은 속개되었다. 위지손은 전날 확보한 근소한 우위를 지키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 여목은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갔다. 위지손이 달아나면 여목이 접근했고 위지손이 멀어지면 여목은 다가갔다. 치고 빠지기를 수십 합. 찌르고 피하기를 또 수십 합. 그러나 승부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의 연속이었다. 위지손의 머리 속에 끈질기게 추격해 오는 여목의 형상이 그려진다. 위지손은 마음을 다잡는다. 위지손은 이 한 판의 바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수많은 중원의 고수들을 짓밟고 여기까지 온 여목에게 자신마저 무너진다면 그것은 대륙의 마지막 남은 요처(要處)를 내주는 꼴이 된다. 그럴 수는 없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두 사람은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나아갔다. 한 나절이 지나고 100여 수가 가까워졌으나 위지손의 근소한 우세는 변함이 없고 바짝 따라가는 여목의 행보도 변함이 없다. 이대로 가면 승부가 끝나리라. 그대가 아무리 날 쫓아와도 대세는 거역할 수 없으리라. 머잖아 승부의 종착점에 그대와 내가 기어이 도착하고 말리라. 위지손은 눈을 감고 애타게 승부의 혼을 부른다. 돌아가라, 여목！ 중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일개 조선의 기객에게 대륙의 은신처를 노출시키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중원의 뭇 강호들을 그대의 무릎 앞에 굴복시키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그대의 소임은 끝났다. 돌아가라, 조선의 기객 여목이여！ 그대의 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던가. 희고 고운 백의민족이 아니던가. 여목은 기다린다. 하염없이 기다린다. 승부처가 올 때까지 반상의 주변을 끝없이 서성거린다. 그것은 참으로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이었다. 여목은 눈을 감는다. 아득한 옛날 먼 조상들의 말발굽소리가 여목의 귓전에 생생하게 울려 퍼진다. 대인이여！ 길을 비켜 주시오. 그 넓은 대륙은 원래 조선의 땅이었소. 조선의 영토요 조선의 낙원이었소. 이제 옛 주인이 찾아왔거늘 무얼 그리 망설이시오. 대인이여！ 먼 길을 달려온 동방(東方)의 아들에게 부디 길을 비키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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