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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 7부 구한말의 대국수 (2)

2007-03 조회 3712추천 0 프린트｜스크랩

원세개가 40여 수 복기를 하다가 여목에게 물었다. 「이 수가 언뜻 이해가 안 되네. 다른 큰 곳도 많은데 이런 끝내기 같은 수를 두다니……. 뛰어듦도 아니고, 건너가는 수도 아닌데 왜 이 수를 두었는가? 후에 수가 성립하기는 했지만 차단을 당하니 오히려 보태 주는 꼴이 아닌가?」「아닙니다, 대인. 언뜻 보기에는 손해 같지만 이는 오히려 차단을 유도한 수로서…….」 여목은 양손에 흑돌과 백돌을 쥐고 재빨리 그 변화를 보여 주며 설명했다. 「결국 중반에 접어들면 이런 수순을 겪을 수밖에 없고 차단한 백의 돌이 오히려 쫓기게 되니 안이하게 이 수를 대처하다가는 전체 국면을 그르치게 됩니다.」「과연!」 원세개는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조선에는 인재가 많아. 그렇지 않소, 문성공?」 마치 청태종의 말을 상기하듯 원세개는 여목의 어깨를 두드리며 문성공에게 물었다. 「…….」 문성공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 비록 원세개 개인의 말에는 찬동하는 것이지만 인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에 몸을 의존하는 지금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고, 아니라고 말한다면 조선에 인재가 없기 때문에 청국의 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직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여목과 문성공에게 원세개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던졌다. 「내일 상께 국태공의 귀국을 청하오리다.」 문성공의 발길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문성공의 백발성성한 머리가 스물여섯의 원세개에게 깊숙이 숙여졌다. 원세개는 이미 돌아서서 처소를 향하고 있었다. 「여목, 자네의 바둑 한 판이 조선 국부의 조속한 생환에 큰 도움을 주었음일세. 내 사사로이 자네에게 일등 호답 열 마지기와 비단 스무 필을 내리겠네. 적다 하지 말고 받아 주게. 자네가 조선을 구했음일세.」「아닙니다, 대감. 바둑에 몰두하다 보니 대감의 가르침을 잊어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바둑을 둘 때는 냉엄한 승부사의 얼굴이던 여목이 지금은 그저 부끄럼 많은 약관의 청년에 불과했다. 「아닐세, 정사를 안다고 생각하던 나였지만 상대를 파악하는 데는 한갓 젊은 자네의 안목보다 못하지 아니한가.」 기실 대원군의 귀국을 주청 드리리라 하던 원세개는 차일피일 그 일을 미루기만 하고 조선의 기객들을 상대로 바둑만 두며 시간을 끌어 왔다. 문성공은 욕심 많은 두꺼비를 상대로 그 심기를 건드릴까 저어하여 항상 조선의 기객들에게 적당히 져 주라고 부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실상 원세개는 엄청난 강자였다. 조선의 기객들은 실력으로 지고서도 마치 문성공의 부탁을 들어 준 양 목에 힘을 주곤 하였다. 「원세개는 강합니다.」 여목이 말했다. 「그리고…… 원세개는 큰 그릇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탐욕스러운 사람 같지만 그 탐욕의 가면 뒤에는 원대한 야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의 바둑이 그렇습니다.」 북경의 겨울 바람이 뼛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여목은 어지러운 조선의 정세를 생각하며 과연 자신이 조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했다. 여목 자신은 개인적으로 원세개와 가깝다. 하지만 지금의 원세개는 서태후 사후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개혁 세력을 억압하는 데 일익을 맡았을 뿐, 어느 정도 개혁 세력을 견제하는 데 성공한 청나라 조정이 원세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기 때문에 실각당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며칠 전 북경에 처음 당도한 여목에게 원세개는 환영의 뜻으로 만찬을 준비하였다. 비록 현재는 실각당했다 하나 중국 최고의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 조선으로부터 온 일개 기객(棋客)에 대한 예우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갑신정변 후에 맺어진 원세개와 여목의 바둑을 통한 끈끈한 우의는 원세개가 조선 땅을 떠날 때까지 10년을 이어져 왔다. 원세개는 가끔씩 여목을 청영(淸營)으로 불러 바둑을 두며 이국 땅의 무료함을 달래곤 하였다. 바둑을 두고 난 후 여목과 개인적으로 마시는 술자리에서 원세개는 간혹 속에 담고 있는 말을 내비쳤다. 「사람은 꿈이 커야 한다. 결코 종이와 붓 따위에 사로잡혀서는 못 쓴다. 나에게 1만 명의 정예군대만 있으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그 천하는 지금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대인의 몸은 멀리 조선땅 위에 있습니다.」「그런가?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다. 청국은 아편전쟁 이후로 그 허약함이 열강들에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세력이 오래 가지 못한다. 천하는 지금 한 여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분이 돌아가시면 더 이상 청국의 우산으로 넓은 땅을 감싸지 못한다. 당연히 각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것이고……결국 승자는 잘 훈련된 군사를 지닌 사람이 될 것이다.」 원세개는 그렇게 서슴없이 여목에게 자신의 야망을 표출시키곤 하였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원세개가 불러들인 청군이 일본군과의 전투를 개시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원세개는 이홍장으로부터 귀국을 명령받았다. 조선을 떠나기 직전 여목을 부른 원세개는 마지막으로 바둑을 한 판 두고 여목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게, 여목. 천하를 얻는 데 10년 혹은 20년의 세월은 오히려 짧지 아니한가? 내 언젠가 자네를 꼭 부를 테니 그때 다시 수담을 나누며 세월의 회포를 풀기로 하세.」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인편으로 초대장을 보내 여목을 북경으로 불렀던 것이다. 「여목, 입계의완(入界宜緩)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원세개는 서태후로부터 현대적인 군대의 양성을 명령받은 후 지금까지 기르고 있는 독일식 카이제르 수염을 매만지며 여목에게 바둑 이야기를 꺼냈다. 입계의완이란 당나라의 기대소 왕적신(王積薪)의 위기십결(圍碁十訣)에 나오는 말로서 무슨 일이든 결정적 시기가 있는데 포석에서 중반으로 넘어갈 때 승패의 갈림길에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지금의 조정은 나 원세개를 불신하여 일시 밀어냈지만 오래 가지 못하네. 나에게는 청국 황실의 명령보다는 내 개인의 명을 우선적으로 따르는 충성심 높은 군대가 있기 때문이지. 청국 황실은 조만간 나를 재등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왜 직접 군대를 일으키지 않으십니까?」 원세개와 마주앉아 있는 여목의 모습이 당당하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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