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때아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탓인지 도장은 대낮에도 침침했다.

유민재가 다녀간 후 동삼은 마음이 무거웠다. 문득문득 스승을 대하면서도 여느 때보다 더 스승이 낯설고 생소했다. 이젠 습관이 되어 버린 스승의 무심한 시선도 자신의 우둔한 자질 탓으로만 돌리기엔 어쩐지 심사가 틀어졌다.

스승의 무심한 눈길은 명운을 따라잡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음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아 그런지 최해수도 자신을 대하는 것이 전과 다르게 느껴졌고 여전히 명운은 매사에 자신만만했다.

밤이 되자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어느 틈에 눈으로 변했다. 뚜― 하고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젊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명운에 비해 늦게 시작한 공부가 아닌가. 더구나 가야 할 길이 지나온 길보다 훨씬 더 멀다.

새삼 마음을 다잡은 동삼은 뒤채 우물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정신이 한층 맑아졌다.

그래,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되돌아가자.

얼굴에 남아 있는 물기를 털어 내며 앞을 바라보던 동삼은 여름이면 더위를 피하곤 하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희뿌연 물체를 발견했다. 짙은 어둠 때문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불길한 예감으로 동삼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뒷덜미를 누가 자꾸 잡아당기는 것같이 불안했다. 다가갈수록 윤곽이 뚜렷해졌다. 틀림없이 사람이었다.

마를 꼬아 만든 가느다란 밧줄에 매달려 건들거리고 있는 시신은 목부분이 꺾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듯한 허연 눈자위와 혀를 길게 내민 얼굴은, 어둠도 어둠이려니와 공포와 경악으로 인해 처음에는 누군지 쉽사리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동삼은 시신의 주인공이 유민재임을 알았다. 민재의 발밑에는 목판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무 가까이 다가간 동삼은 축 처져 건들거리고 있는 시신을 끌어안았다. 무섭다는 생각보다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꿈을 꾸듯 사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잠을 자던 최해수가 달려나오고, 동문들이 모여들고…… 나무에서 민재를 내려놓았지만 민재의 맥박은 이미 끊어진 후였다.

누군가 가져온 관솔불 아래 비춰진 민재의 얼굴은 생전에 비해 음영이 짙었다. 약간 틀어져 있는 그의 입매는 마치 누군가를 조소하는 것 같았고 평소에도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 민재의 안색은 붉은 관솔불 아래서도 야위고 푸르스름했다.

어느새 설숙 스승이 와 있었다. 스승은 굳은 얼굴로 장승처럼 선 채 민재를 내려다본다. 마지막 불길을 피워 올리던 관솔불이 마침내 칼로 잘리듯 꺼졌다. 어둠이 왈칵 밀려왔다.

「불민한 놈…….」

스승의 음성이 어둠 속에서 들려 왔다.

민재의 시신은 산에 묻혔다.

그의 관 위에 한 삽 두 삽 흙을 떠 넣으며 최해수는 눈물을 흘렸다.

7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최해수와 유민재. 그 동안 맺히고 쌓인 게 얼마나 많았겠는가. 민재는 동문들 중 그 누구와도 원만하지 못했으나 그나마 최해수만은 곧잘 따랐다. 최해수를 대할 때만은 피를 나눈 형님을 대하듯 했다. 최해수 또한 몸이 약한 민재를 여러 모로 보살펴 주었다.

숫돌에 칼날을 갈 듯 살았던 유민재. 생각해 보면 외로운 주검. 딱히 찾아올 친척도 없고 연락해 줄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 2대(二代)가 목을 맨 생(生)과 사(死)였다.

초라한 대로 봉분이 완성되었다. 뗏장도 입히지 못한 황막한 무덤이었다. 어디선가 솔바람이 싸하니 불어왔다. 까마귀 몇 마리가 푸드덕 무리를 지어 건너편 봉우리로 날아갔다.

민재의 옷가지에 불을 붙여 놓고 동삼과 최해수는 무덤 앞에 앉았다. 울어서 붉게 충혈된 눈으로 최해수는 타오르는 망자의 흔적을 애달파했다.

동삼은 더듬더듬 호주머니를 뒤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2년 전 도장을 나와 떠돌 때 만난 한씨 노인의 유품이었다.

동삼이 한씨 노인을 만난 곳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 다리 밑이었다.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려고 다리 밑으로 내려간 동삼이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얘야. 이리 들어와서 비를 피하렴.」

움막을 덮은 거적을 들추며 한 늙은 걸인이 동삼에게 말을 건넸다. 까치집을 한,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걸인이었다. 동삼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 노인은 동삼의 손을 잡아 끌며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한 평 남짓한 움막이었는데 동삼은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배고프거든 이걸 먹어라.」

노인이 동삼에게 불쑥 함지박을 내밀었다. 금이 가서 갈라진 부분을 굵은 철삿줄로 듬성듬성 꿰맨 함지박 안에는 밥이 들어 있었다. 그날따라 일거리를 하나도 얻지 못해 점심 때부터 굶은 동삼은 스스럼없이 그가 내민 함지박의 밥을 퍼먹었다. 그러한 동삼을 물끄러미 보며 노걸(老乞)이 말했다.

「얘야, 너는 걸상(乞相)이 아니구나.」

「걸상이 따로 있습니까. 얻어먹으면 다 걸인이지요.」

노걸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마음이 편치 못하면 결코 걸인이 되지 못한다.」

그날부터 동삼은 노걸과 함께 살았다. 노걸은 주위 다른 거지들에게서 한씨라고 불렸고, 동삼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노인은 하루 한 번 이상 밥을 얻으러 가는 적이 없었고 필요 이상 많은 밥을 얻어 오는 법도 없었다.

같이 생활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어 본 동삼은 뜻밖에도 노인이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는 노인에게 어떤 신사가 찾아왔다. 양복을 말쑥하게 뽑아 입은 신사였는데 두 사람은 움막 안에서 뭔가 오랫동안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그 신사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사람은 내 조카다. 내가 공부시켜 주고 결혼도 시켜 주고, 몇 십 년 해 오던 가게까지 물려 주었지……. 조카 며느리와 내가 잘 맞지 않더구나. 그래서 내가 나와 버렸다. 자꾸 사서 고생하지 말고 자기가 잘 모실 테니 들어와 살라는구나. 그 아이 눈에는 내가 고생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지.」

「따라가실 걸 그랬나 봐요.」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은 넉넉했다.

「이게 편하다.」

동삼은 노인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꾸어 왔고 지켜 왔던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왜 초라한 걸인이 되어 떠돌아다니는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동삼과 같이 생활해 온 지 달포가 흐르는 동안 노인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어떤 때는 밥을 얻으러 갈 기력조차 없어 동삼이 일을 해 먹을 것을 가져오면 같이 나누어 먹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삼에게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날은 동삼에게 특히 일거리가 많은 날이었다. 동삼은 노인이 제일 좋아하는 밀가루 빵을 한 봉지 사들고 움막으로 돌아왔다. 잠자는 노인을 흔들어 깨웠지만 노인은 움직일 줄 몰랐다.

동삼은 마침내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노인의 얼굴은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동삼은 노인의 죽음을 근처 움막에 사는 걸인들에게 알렸다. 그의 시신은 동료 걸인들이 수습했다.

몇 번 찾아온 적이 있는 조카의 주소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움막을 뒤졌지만 움막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노인이 입고 있던 해진 옷에서 종이에 적힌 한시(漢詩) 한 수를 찾아냈을 뿐이다.

그 종이가 지금 동삼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였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에는 한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空手來 空手去 
  世上事 如浮雲 
  成墳土 人散後 
  山寂寂 月黃昏

한문깨나 하던 날품팔이 임씨 아저씨가 풀어 준 뜻은 이러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세상

인간 세상 만사가 다 뜬구름과 같구나

무덤 위에 흙이 쌓이고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니

산은 저 홀로 쓸쓸하고 황혼에 뜬 달만 외롭구나.

당시 이 글을 처음 한씨 노인 품속 주머니에서 발견했을 때는 단순한 하나의 시구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글은 한마디로 무상(無常)을 설하고 있었다.

동삼은 그 종이를 유민재의 옷가지 위에 던졌다. 바짝 마른 종이는 금시에 오그라들더니 찰나지간 맹렬한 불길을 피워 올린 후 이내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 갔다.

동삼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도대체 바둑이 무엇이기에…….」

불길이 꺼지고 잿더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