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대국3, 선비만석님

기분이 승하여 술이 과했는지 주차장 속 차에 가서 잠시 잠이 들었다.

한기에 잠이 깨어 돌아오니 지하의 노래방에서 흥겨운 노랫가락 들이 들린다.

저니 님은 방 한 켠에 이불을 피고 이미 잠들어 있다.

준비에 2주전부터 마음 쓰시고 오늘도 온갖 작은 일들 수발 드시느라 피곤한데 술도 여러 잔 드셨겠지.

도리님이 산아래 여관으로 가시자 하는 것을 사양하고 옆 건물2층 작은방으로 선달님이 안내해 주신다. 전기장판의 따뜻함 속에 몸이 약한 처 걱정도 덜어진다.

바둑캠프는 밤을 세우는 것이 원칙인데 산중 작은방에 무서울까 봐 혼자 떼어놓지를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곁에서 잠들었다.

금요일저녁에 미리 대구로 혼자 내려갈까,

경주의 법명스님에게 들려 그 길로 대구에 갈까,

공주에 이청 작가님께 들려 모시고 대구로 내려갈까,

처는 피곤할 텐데 집에서 쉬게 하고 혼자 서울로 가서 KTX를 타고 갈까,

그리도 많은 여러 가지 궁리를 머릿속에서만 하다 처와 상의하니 자기가 가는 것이 불편하지만 않으면 같이 가자고 한다.

사실 먼 길을 혼자 가기로 했다가는 이런 저런 핑계로 원행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성격을 너무 잘 아는 처여서 같이 나서준 것이니 고마울 뿐이다.

하루 종일 새벽부터 서두르고 운전도하고 휴게소마다 커피에 우동에 여러 가지를 챙겨주느라 피곤했을 처를 무서움을 많이 타는 것을 알면서 혼자 두지는 차마 못한다.

병원에서 1박2일로 문막 콘도에 바둑동호회 모임을 떠나면 저녁식사 시간도 아끼느라 먹을 것은 준비하고 밤새 바둑을 두곤 다음날 12시 체크아웃 시간이 되어서야 아쉽지만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고, 조령 새재 모임 때도 밤새 바둑을 두다 새벽4시경에 억지로 아침일정을 위해 눈을 잠시 붙이기로 하였었지.

새벽에 건너편 큰방을 보니 카텐이 쳐져 있어서인지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복도 쪽도 컴컴한 것을 보며 피곤해서 다들 주무시나 보다 싶으며 자리를 같이 못한 미안한 마음이 조금 안도가 된다.

6시경 만석님과 이청 작가님이 두신 바둑을 복기하시는데 뒤에서 바라보다 슬그머니 곁에 앉는다.

어제 토나멘트 에서 우승을 하신 선비만석 님과 친선대국을 시작한다.

파죽지세의 전승으로 결승전에서 박 시인까지 이기신 저력을 보면 굉장한 실력이신가 보다 싶어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다.

돌을 가르니 백이다. 흑번 에 양소목으로 두어야 그나마 승률이 좋은데 내심 또 걱정이다.

거구의 중압감처럼 초반부터 대형 전투를 준비 하시는 압박감이 밀려든다.

화점 날일자 걸침을 두칸 높은 협공으로 받자 대뜸 중앙으로 한칸 뜀을 두 번 하신다.

하변 실리를 주더라도 좌변공격으로 주도권을 잡으시려는 보통 하수들에게 상용하는 수법이거나 전투를 즐기시는 분들의 초식인데 흑의 우상 귀에 잽을 던지는 기분으로 날일자 걸침을 던져본다.

고성에서 대구까지 지도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은듯싶은 길인데 8시간 걸리는 것을 6시간대에 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하시던 선달님의 말씀처럼 그 먼 길을 편치 않은 몸으로 달려오신 선비만석님의 바둑사랑은 대단하게 느껴지며 퇴원 후 지속적인 운동으로 많이 회복되셨다고는 하나 걸음걸음도 편치 않으신듯해 내 마음조차 조심스러웠다.

송림사의 철탑, 석탑들은 모두 대형석재로만 만든 줄 알았는데 신라 때의 보물인데 벽돌 식의 모습과 상단의 철탑은 신기하다. 그 앞에서 마냥 즐거워하시던 선비만석님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계속 되는 밀어붙이는 압박감에도 후일을 기약하며 흠집은 남겨놔야 하기에 귀살이를 한다.

흑이 두텁게 한 수 더 밀어놓으면 그만인 것을 조금 더 두텁게 좌변공격을 의식하셨는지 빈삼각 이다.

아이쿠 간신히 한 점 벌었군!

이단 젖힘의 호기를 얻어 조금 실리가 생긴다.

아침식사는 7시부터라고 선달님이 말씀하신다.

어제 내가 너무 장고인 것을 보셔서 식사 전에 대국이 끝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모습인 듯 하다.

좌변에서 중앙으로 떠있는 백 말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며 강공을 하신다.

꿈의구장에서 방내기로 다져진 기본기와 이기던 지던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체질 이어 두텁게 두텁게 활로를 열어두었는데도 강공을 하시려니

또 한번 빈삼각이 나온다.

두번의 빈삼각.

간밤에 오리고기 남은 것을 음식물은 버리면 안 된다며 다시 철판에 볶는 만석님.

핑계 김에 소주도 한잔 곁들인다.

내 마음을 아시는지 박 詩人은 소주 한 잔과 안주를 갖다 주신다.

낮술은 물론 아침술은 명절날 기발기 한잔이나 해 보았을까 사회적으로도 금기일 텐데

미얀마에 의료봉사를 가서부터 습관이 되었다.

험준한 고산지대 소수민족마을에 힘겹게 도착하여 의료봉사를 하노라면 마을사람들은 감사를 표하려는지 식사 때마다 촌장이나 향장이 항상 술을 들고 서서 있다가 잔이 비기가 무섭게 채워준다. 그분들의 풍습이고 그렇게라도 감사한 마음을 표하시는데 사양을 못하고 아침부터 70도 짜리 찹쌀백주 는 그 맛이 청아하다.

詩人이 주신 아침 잔에 선비만석님과의 편안한 바둑은 가히 도원경이다.

어떻게 어떻게 창과방패 처럼 피하기만 하다 바둑은 마무리되었다.

중간부터 관전을 하던 박 詩人과 복기를 하는데 박 시인도 타젬7단답게 지적을 한다.

“빈삼각 두 번에~”

이기던 지던 승패야 무슨 상관일까?

다만 술과 대화로도 풀 수 없던 알 수 없던 많은 부분들을 수담을 나눠보면 느끼게 된다.

비슷한 기력이어도 기풍과 스타일들은 천양지차 이다.

팔공산 에서 둔 세 판의 바둑, 용마님, 박 시인, 선비만석 님, 그리고 네 번째 이청 작가님과의 친선바둑.

한판 한 판 의 바둑에서 그분께서 살아 오셨던 겪어오셨던 기백과 풍상을 같이 느껴본다.

어려움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있었던 것 이겠지만 위기의 타개는 어떻게 하셨었을까, 여유가 있을 때는 어떤 쪽을 돌보셨을까 등 나름대로 생각해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여설하 작가님의 글 속에 점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매화점 관자 占, 나는 바둑점을 치는 것인가?

어쨌던 조령 새재 모임에서도 굴초 님과 천라지망 님 연인 님 모두 바둑을 두고 난 후에 더욱 가까워 지는 기분과 그분들의 깊이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쉬운 마음으로 수련장을 떠나서 케이블카를 타고 팔공산 정상에 오른다.

카자흐스탄 3,500고지 메데우 山 에 올라서도 느껴보지 못하던 가득 찬 감흥과 기쁨이 치솟는다.

함흥식 회냉면에 어릴 적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던 추억을 떠올려본다.

동화사의 규모와 大佛을 관람하곤 선비만석님과 헤어짐이 아쉬워 포옹을 한다.

아쉬운 이별들에 여름엔 고성에서 선비만석님이 초빙하고 가을엔 갑사에서 이청 작가님이 초빙하기로 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오로에서 만난 바둑인들, 글벗들 이분들과의 관계가 앞으로는 가장 소중한 인연이겠지.

조령 새재에서 오로 글벗들의 모임 후 느낌이 너무 좋았어 서 그 후 해외봉사단 젊은이들의 MT를 조령 새재에서 한 번 개최했으나 그 때의 같은 감흥은 느낄 수 없었다.

역시 비슷한 연배의 바둑을 사랑하는 글벗들끼리 느끼는 정취는 여타의 모임과 같을 수가 없는 것 이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