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판수는 불문곡직하고 말했다.

「추 사범. 당신을 내세워 내기바둑을 주선하고 싶소.」

황판수는 동삼의 진정한 실력을 몰랐다. 그러나 사람을 보는 황판수의 감각은 탁월했다. 비록 자신의 기력은 3급 정도였으나 승부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으로 황판수는 오래 전부터 동삼의 바둑이 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늦게까지 황판수와 동삼은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황판수는 주절주절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내가 이 각박한 도박 세계에 처음 뛰어들 때였소.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소.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게 하나 있소. 그건 바로 승부의 냄새를 맡을 줄 안다는 거요. 단지 그때는 노름을 하면서 승부를 짐작했는데 이젠 노름을 하기 전에 벌써 승부를 예측한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아무튼 내가 도박에 관여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소. 승률이 반타작을 겨우 넘을까 말까 할 때여서 전주가 생긴다고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애송이였소. 한번은 화투판에서 날 유심히 지켜보던 이상태란 사람이 내게 접근하더군. 내 노름이 싹수가 보인다면서 자기가 돈을 댈 테니 자기 선수로 뛰어 달라는 거였소.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 지금 생각하니 그 양반은 적어도 그 당시 그 세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소.」

황판수는 동삼이 따라 준 소주를 급하게 비웠다.

「이상태는 우선 날 고깃집으로 데려갔소. 밤새워 노름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때야 젊다기보다 어린 때여서 그런 걸 잘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건 노름의 첫 번째 철칙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소…….

각설하고, 같이 앉아서 고기를 먹는데 이상태 그 사람, 자기는 안 먹고 고기가 익는 대로 내 쪽으로 살살 밀어 주는 거야. 기분이 묘했소. 그런 게 전준가 싶기도 하고…….

약속 장소 근처에서 나 보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그는 급히 약방으로 뛰어갔소. 중국에서 건너온 청심환 한 알 하고 이름도 생판 들어 본 적이 없는 고급 피로회복제 한 병을 사 오더니 나 보고 먹으라고 합디다. 아무 생각 없이 먹었소. 그리고 그날 승부에서 졌소. 물경 300원 가까운 거액을 날린 거요. 그 당시 300 원이 얼마나 큰돈이었는지는 추 사범도 잘 알 거요.」

황판수가 지난 이야기를 하며 아쉬워한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돈은 이상태의 종(終)돈이었소. 하지만 어쩌겠소.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그리 된 것을. 그리고 몇 달이 지났소. 우연히 이상태를 만났는데, 후일 생각해 보니 아마 일부러 날 찾아온 것이었소. 마침 내가 노름으로 200원 이상 올리고 난 직후였소.

그가 날 불러내더군. 오늘처럼 보슬비가 내리는 오후였소. 어느 조그만 골목길에서 그가 내게 말했소. 돈 좀 올렸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기분이 확 상했소……. 내가 생각해도 그땐 참 어렸소.」

황판수는 조금 남은 소주를 병째로 나발을 불었다. 그의 말에 쓸쓸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가 그러더군. 어이 황! 좀 봐 줘……. 보쇼, 뭘 봐 달란 말이요? 그가 내 손을 잡더니, 돈 좀 올렸다더군, 좀 봐 줘. 무슨 소리요? 내가 화를 내며 따졌지. 그가 말했어. 그때 내가 밀었다가 그리 됐잖아. 그때 일은 그때 일 아뇨. 내가 일부러 진 것도 아니고 남자가 한번 밀어 주면 남자답게 끝내야지. 뭘 그때 일을 가지고 지금 와서 추잡스럽게 따지는 거요. 내가 볼 때 이형 매너가 잘못 됐소. 그러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러더군. 어이 황! 그래도 좀 봐 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 버렸소.」

황판수는 한숨 쉬듯 담배 연기를 허공에 훅하고 뿜어 낸다.

「그 뒤에 이상태를 꼭 한 번 더 본 적이 있었지. 내가 호구 하나 잡아서 껍데기를 벗기고 있을 때였소. 이상태가 선수 한 명을 데리고 그 자리에 나타났소. 잘못하면 판이 깨지기 십상이었지. 이상태가 자기 선수를 돌려보내고 나를 불러내더군. 황! 미안하게 됐어, 소문 듣고 찾아왔는데 황이 터를 닦은 줄 몰랐어. 그러고는 미련없이 돌아가더군. 말하자면 개인적인 감정은 감정이고 도박판 규칙은 규칙이란 거지…….」

황판수의 목소리에 짙은 비감이 묻어났다.

「그러는 게 아닌데…… 정말 그러는 게 아닌데……. 그래도 좀 봐 달라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근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소. 그날 이후 이상태를 한 번도 못 만났소……. 어이 황! 그래도 좀 봐 줘……. 이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만날 수 없고……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이미 황판수는 완전히 취해 있었다.

황판수의 눈이 물 먹은 한지처럼 축축했다. 황판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마음 놓고 쉴 곳이 없는데…… 화투판에 앉아서 화투가 몇 판 돌아가고 나면 어찌 그리 마음이 편하던지……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황판수는 바닥에 꼬꾸라졌다.

떠돌아다니던 동삼이 타인에게 정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랫목을 비워 두고 벽 쪽으로 오그리고 누운 황판수의 등이 무척이나 추워 보였다. 동삼은 이불을 끌어당겨 그에게 덮어 주었다.

그 후 동삼은 황판수가 주선하는 내기바둑을 여러 차례 두게 되었다.

황판수가 동삼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한적한 주택가였다. 말없이 따라오기만 하던 동삼이 황판수에게 물었다.

「어딜 가는가?」

「우리 같은 사람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 있네.」

황판수가 멈추어 선 곳은 호화스러운 어느 저택 앞이었다. 황판수는 태연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사람은 쉰 살 가량 되어 보이는 그 집 주인이었다. 원만한 얼굴, 구김 하나 없는 줄무늬 감색 순모 바지에 윤기가 반들반들 흐르는 실크 와이셔츠를 걸친 다소 비대한 체격의 사내였다. 주인은 황판수와 동삼을 반갑게 맞았다.

「나 한덕우(韓德宇)라고 하오.」

동삼을 향해 손을 내민 사내가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동삼이라고 한 사장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혜화동 부자로 널리 알려진, 섬유업을 하는 한 사장은 당시 내기바둑계의 거물로서 전문기사들과도 교분이 두터운 소문 난 바둑광이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비록 큰 내기는 아니었으나 바둑을 두기만 하면 승부에서 이기곤 하는 동삼이 한 사장의 정보망에 걸린 것이었다.

일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도박을 좋아하는 한 사장은 이미 황판수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한 사장의 연락을 받은 황판수가 동삼을 데리고 그 집으로 찾아간 것이었다.

한 사장은 정중하게 동삼과 황판수를 자신의 서재로 데리고 갔다. 서재에는 흡사 도서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서가 한켠에는 일렬로 진열된 바둑책도 상당수 보였다.

그곳에는 이미 몇 명의 사내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그만그만한 재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귀한 분을 좀 모셨소. 추 사범, 모르시겠소? 한일기원의 전문기사이신 정천명 사범. 지금 4단이지요.」

한 사장이 동삼에게 정천명 사범을 소개했다. 동삼이 그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했다. 반면에 정천명 4단은 고개만 약간 까딱할 뿐이었다. 한일기원이 발족했지만 연륜이 짧아서 4단이라면 상당한 고단이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정천명 사범은 깡마른 얼굴에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매우 차갑고 오만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