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날. 

설숙은 시장 근처를 지나다가 해괴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 술에 취한 한 사내에게 행길가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사내는 연신 여인의 손을 잡아 끌었고 여인은 싸늘하게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보쇼. 과부 사정 홀애비가 안다고 청승 그만 떨고 우리 한번 잘해 봅시다.」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 사람은 오히려 재미있게 구경을 했고 대부분은 사내의 큰 체격에 질려 쉽게 나서질 못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따라와.」

사내가 노골적으로 협박을 한다. 여자가 분을 이기지 못해 바들바들 떤다. 사내가 다시 여인의 손을 잡아당긴다.

「따라와.」

「이 손 놓지 못하오!」

여인의 목소리가 쇠를 가르듯 강하게 울리더니, 순간 사내의 뺨을 친다.

「아무리 세상이 뒤집혀졌기로!」

사내가 여인을 보고 씩 웃는다. 잔인스러운 웃음이다.

「말로 했더니 안 되겠군.」

사내가 여인의 손을 비틀어 쥔다. 우악스런 손길에 여인이 비명을 지른다.

사태를 주시하던 설숙이 격노했다.

「네 이놈! 백주 대낮에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 어서 그 여인의 손을 놓지 못할까!」

백면 서생의 모습, 설숙의 고함에도 사내는 눈썹 하나 까딱 않는다. 되려 설숙에게 달려들 기세다.

「당신은 또 뭐야! 왜 남의 일에 참견이지, 어디가 부러지고 싶나!」

사내가 여인을 다잡고 설숙에게 다가온다. 잘못하면 시정잡배에게 설숙이 수모를 당할 판이다. 그때 한 왜소한 사내가 앞으로 나선다. 설숙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설숙도장 마름인 김 서방과 친분이 있는 만조라는 전라도 청년이었다.

「웬간허면 그냥 넘어갈라 했는디 배아지 꼴려서 못 보겄당께.」

만조는 눈앞의 건장한 사내를 동네 강아지 보듯 한다. 처음에는 움찔하던 사내가 만조의 키가 자기 턱 밑으로 내려올 정도로 작은데다 몸집마저 왜소한 걸 보더니 다시 기가 살아난다.

「이건 또 무슨 물건이야? 조막만한 놈이.」

만조가 씨익 웃는다.

「임자 얼굴은 개를 닮았당께로.」

「뭐라고!」

사내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진다.

만조가 고함을 친다.

「야, 이 빌어처먹을 놈아! 이분이 뉘신 줄이나 아는개비여? 조선의 국수이시며 영남 유림계의 거목이신 설숙 선생이란 말시. 좌우당간 좋게 말헐 적에 이 어른 앞에 어서 무릎 꿇랑께.」

사내가 미친 듯이 만조에게 달려든다. 그 순간 만조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그의 발길이 달려드는 사내의 턱을 강타한다. 연이어 만조의 관수가 허공을 가르며 사내의 옆구리를 예리하게 찔러 버린다. 눈깜빡할 사이에 사내는 걸레가 되어 땅바닥에 쭉 뻗어 버렸다.

만조가 엎어진 사내의 머리를 밟으며,

「사람 머리라는 게 옳게 쓰면 득이 되는디 잘못 쓰면 이러크롬 된단 말이시.」

말투는 유들유들하지만 만조의 눈에는 살기가 감돈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얼굴이 겁에 질려 새파래진다.

「너 같은 놈 죽여 봤자 송장 잡는 것이고 잉. 옛날 겉음사 멍석말이를 혀서 쳐죽여도 상관 없을 것인디, 인간이 불쌍혀갖고 목숨만은 살게 혀줄 것잉께, 어서 이 어른헌티 잘못을 빌랑께로.」

사내가 비실비실 일어나는데 만조가 이번에는 사내의 정강이를 찬다.

「꿇랑께.」

사내가 두말 없이 꿇는다.

「빌랑께로!」

설숙이 나섰다.

「그만하면 됐네.」

설숙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개처럼 꽁지를 말더니 내빼 버렸다.

서 여인이 만조에게 허리를 굽힌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서 여인의 눈에 눈물이 비친다.

「나헌티 치사할 거 없으라우. 이 어른이 아녔으면 나도 이러크롬 안 나섰당께로. 인사는 이 어른헌티 하시쇼.」

서 여인이 설숙 앞에 고개를 수그린다.

얼굴을 드는 서 여인과 설숙의 눈이 딱 마주친다. 구김 하나 없는 옥양목 두루마기를 걸친 천상의 선관처럼 맑은 얼굴, 설숙을 보는 여인의 눈이 흔들린다. 얼굴이 붉어진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좋을는지…….」

여인의 목소리가 떨린다.

「과람한 말씀이오.」

돌아서면서 설숙은 여인이 드물게 곱다고 생각한다.

구경꾼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여인은 멍하니 설숙의 뒷모습을 본다. 바람에 여인의 한복치마가 펄럭인다. 눈부신 인견 속치마가 보일락말락 펄럭이는 것도 모르고 여인은 설숙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며칠 후 만조가 설숙을 찾아왔다. 손에는 조그만 물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며칠 전에 그 여인네께서 저헌티 좀 전해 달라 혀서.」

만조가 포장지로 싼 물건을 내민다. 설숙은 잠자코 말이 없다.

「그럼 가보겠으라우.」

만조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도무지 어렵당께…….」

중얼대는 목소리가 사라진다.

설숙은 포장지를 뜯었다. 백운상석으로 만든 귀한 남포벼루였다. 벼루 위에는 하얀 편지지 한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지난번에는 송구했습니다.’

연필로 꼭꼭 눌러 쓴 또렷한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설숙은 콧날이 오똑했던 단정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쩐지 부담스럽다.

설숙은 김 서방을 통해 물건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로 설숙은 서 여인을 몇 번인가 보았다. 출타가 잦은 편이 아닌데도 나갈 때마다 거의 매번 서 여인을 보았다. 큰길 못 미쳐 골목에서, 늘 같은 장소에서 설숙은 서 여인과 마주쳤다.

만날 때마다 서 여인은 설숙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설숙은 여인 앞으로 태연하게 지나쳐 가지만 평소보다 발걸음에 힘이 더 들어간다. 뒷머리가 당긴다.

1년 뒤 만조가 한 소년을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