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37, 신물 나는 바둑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둑을 두자 한다.
워낙 바둑을 좋아하는 그여서 지난 여름휴가에는 강릉의 목욕탕(찜질방)안에서도 바둑판을 가져가 두었었지.

간밤의 숙취로 여관엘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평소 세시면 일어나던 것이 오늘은 8시반 넘어 일어났으니 푹 자긴 한 것인데 그래도 눈뜨자마자 바둑 두자니 평소 그리 가까이 하던 바둑이지만 달갑지는 않다.

올갱이 해장국을 준비해 두었으니 식사시간에 맞춰서 오라는 전화에 두기 시작한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가는 줄만 알았는데 식사 후 1058고지 천황봉 등반 스케줄이 이미 스님께서 안내하시려 준비하고 계셨다.

"신발들이 적당하지 않네요~"
조깅화를 신은 친구와 운동화를 신은 나 역시 운동화를 신은 김사장네 여직원.

산행 길은 인적미답의 처녀림 같다. 밤송이 와 벌어진 틈 속의 작은 밤들은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차로 가까이 가서 조금 올라가면 된다는 예기에 준비도 없이 왔는데 역시 1058고지를 오르기는 이젠 역부족인가.

간밤 나이트클럽을 끝으로 김이사 와 민 교수는 올라갔다. 천 배 삼천 배도 쉽게 한다던 김이사는 40중반이지만 얼굴의 해맑음이 그런 연유 이었군 하고 이해가 되었다.
항상 변함없는 민 교수는 말하는 것이 직업이어서인지 정말 말이 끝이 없었던 기억.
기다리며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려는 나 이지만 몇 마디라도 하고 싶어 그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려도 당최 그치지를 않아 말을 끊고 하고 싶은 말을 몇 마디씩 했던 간밤의 기억.

추석 지나고 입대하려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과 잠시라도 더 있고 싶은 것은 아비의 마음 이겠지. 돌아간 민 교수 가 남긴 말들에 기대를 건다. 이젠 봉사활동과 아이카의 발전에 전념 하겠다던..

산봉우리 바로 밑에서 오르는 길은 거리로는 가까워도 기어오르는 형상이다. 한발한발을 어렵게 숨이 차 헉헉거리며 간신히 옮긴다. 1058고지가 쉬운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후회가 막심이다. 사양하고 되돌아 내려가고 싶지만 버스도 없는 오지이고 앞으로 나가는 외엔 방법이 없다.

꿀물과 커피 오이 과일 들을 준비해온 김대리가 고마울 뿐이다.

산중턱에서 스님은 노래를 한 자락 부르신다.

어렵게 도착한 산정상은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장대한 풍경 속에 어렵게 오른 기쁨을 보상해준다. 군 시절 1156고지 용문산정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오른다.

스님과 김대리만 배낭을 메고 올랐지만 배낭 속의 맥주와 과일 오이 는 감로수이다.

18급이라는 스님은 타이젬에서 대국을 하시는 걸 보면 명정 급수이신지.. 본사 큰 스님 중 한 분이 잘 두시는데 3단이라고 하시는걸 보면 진짜 18급 이신 것도 같고..

스님과의 대화 속에 많은 것을 배우며 느낀다.
속세와 떠났다는 속리산에서 스님에게 듣는 말씀은 새로움과 경이로움의 계속이다. 같이 길가는 이 셋 중에도 스승이 있는 법이라니 산중의 스님이야 산속의 등불 이겠지.

친구는 다시 바둑을 두자 한다.

피시방에 가서 잠시 인터넷을 하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곤 법주사 앞 잘 정돈된 광장에 산보를 한다. 산행에 지쳐 잠이든 친구를 다행스레 여기며 곁에서 슬그머니 잠을 청한다.

저녁식사는 9시반 예정이라며 그전에 바둑을 두자는 친구.
할 수 없이 시작한 판은 항상 즐겁게만 두던 바둑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다.

식사 겸 바람 쐬러 나갔다 와서 이젠 어려운 산행을 마친 날이니 빨리 자야 하는데..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 하면 절대 바둑을 두지 않는 것이 내 습관인데..
친구는 잠도 안 오는데 한판 두잔다.

어제 방송국에 출연을 하고 오느라 다른 친구들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죄인지 정작 다른 친구들은 이미 상경을 했고 남은 나만 바둑상대 역에 고심이다.

한판을 마치곤 친구는 한판 더하자는데 사양을 한다.
이젠 자야지~

내일아침엔 바둑을 안 두어도 되겠군. 7시5분 차로 상경하기로 했으니 그 아침에 두자 고는 않겠지..

서울에 거의 도착하는데 친구는 처의 전화를 받는다.
성묘를 가는 길인데 친구는 키를 안 가지고 나왔나 보다.
사무실로 같이 가 다시 바둑을 둔다.
1058고지를 지천명에 올라 정말 다리도 아프고 피곤한데..
목욕을 하고 편히 쉬고 싶었는데..

저녁7시까지 바둑을 두다 친구는 간다.

내가 그리 좋아하는 바둑인데..
내가 그리 좋아하는 친구인데..
그 친구와의 바둑은 왜 평소와 다른 것인지..

호선바둑에 조금만 방심해도 지는 맞수인 것은 틀림 없는데..

친구를 보내곤 꿈의구장 에서 그리도 원하던 휴식을 취하러 돌아가긴커녕 다른 이들의 대국을 구경한다..

역시 바둑은 오묘한 것이야! (끝)

바둑일기 목록(30~43)

---(30)베스트 일레븐 06/6/14
---(31)호반에서 06/7/9
---(32)목욕탕 바둑 06/8/17
---(33)강짜 06/8/30
---(34)사색연출 06/9/8
---(35)배추部 06/9/16
---(36)Jungle 06/9/30
---(37)신물나는 바둑 06/10/6
---(38)최선의 일착 06/10/23
---(39)행복이란.. 06/10/29
---(40)My Way 06/12/2
---(41)보급기사 06/12/10
---(42)내뜻대로 07/1/4
---(43)산속의 평화 07/3/4

주)전에 써둔 글들을 순차로 올리는 중인데 오해가 있어 일자를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