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99, 그때 그시절

팔공선달과 돌을 가린다.

지난 봄 八公山에선 토너먼트여서 대진표에서 만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 준비된 행사에 시간이 짧아 기회가 없어 아쉬웠었는지 청하길래 반갑게 마주 앉는다.

지난 밤 세시너머까지 정자에서의 술자리와 이야기들은 끝이 나지 않아 한 사람 두 사람 잠자리로 돌아가며 마지막 남은 3쿠션과 선달을 뒤로한 채 더 못 견디고 자리를 떴다. 이청 선생이 자리에 기댄 채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잠든듯한데 이른 아침 곧 일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서로 번갈아 대국들을 즐긴다.

李선생과 영바모, 그시절 님과 이선생 연이어 선비만석과 그시절 님께서 반상에 마주하신다. 오로4단 이시라는 그시절 님의 대국을 관전하노라니 은연중에 노림수를 감춘 반상운석이 오랜 연조를 실감케 하며 전에는 훨씬 더 기력이 출중 하셨을 것 같다.

미국 LA한국기원 털보원장에게 두 점을 접히셨다니 그 분이 한국기원 공인 6 단 증을 가지고 계시더라 지만 그 말씀을 들으며 내심 조금 약하신가 보다 싶었는데 곁에서 관전을 하노라니 그 힘이 느껴진다.

만석님께 두 점으로 둬보시라고 권했다.

압도적인 기백으로 대마사냥을 즐기는 만석님께 세 곳의 대마가 거의 잡힌 모양이 되었는데 중앙의 묘수로 세 곳 대마를 한번에 모두 해결한 그시절 님은 여세를 몰아 우상귀의 공방에서도 밀리지 않고 승기를 잡아놓는다.

비세를 느낀 백의 마지막 공세와 치밀한 끝내기에 결국 십 여 호를 진 흑이지만 젊은 시절 같으셨으면 어림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이청 선생과 3점 대국을 할 때도 곁에서 끝까지 관전하시던 그시절 님은 진정한 바둑애호가이시다. 고수의 대국을 구경해야 한다며 한국기원 연구생출신이라는 이도윤 기자를 청해 영바모와 4점 대국을 곁에서 관전하신다.

숙취해소에 명물이라는 물 회로 아침식사 후 대국을 마치고는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화진포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해수욕장 입구의 플래카드 “소설가 이청 님과 나작 작가님들을 환영합니다”에 세심한 준비에 고생이 많으셨을 선비만석님의 노고가 새삼스럽다.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미국교포 위문공연을 온 한국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향수에 잠기던 기억. 아프기만 했던가?

필리핀 남방 레가스피 에서 태평양을 보며 장대함을 느끼던 기억. 답답했었지.

파나마 운하 서쪽 끝에 서서 대서양을 바라보던 기억. 멀게 느껴졌었지.

어렸을 적 서해안 바닷가로 친구들과 놀러 가 바라보던 바다. 작게만 느꼈지.

이곳 화진포에서 바다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곁에 있는 이들이 편안해서일까?

중2때부터 벗해온 바둑이 편안한 벗들까지 만들어 준 것인가?

메밀 막국수와 동동주 돼지고기보쌈은 별미이다. 서울과 달리 강원도 휴전선 근처여서인지 김치대신 식혜인듯하다. 가자미식혜는 조 밥에 가자미를 삭혀 김치처럼 이북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인데 어렸을 적엔 모르겠더니 이젠 별미인데 서울에선 제 맛을 내기도 어렵고 너무 비싸 평소 맛보기 어려운데 이곳 화진포에서 음미를 하게 되는군.

속으로 혼자 생각하며 미국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기억을 돌아본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철수한 해변대신 숙소 펜션에서 글벗들은 다시 바둑판으로 모인다.

팔공선달과 돌을 가리는데 곁에서 그시절 님은 소라가 백을 잡아야 된다 권하신다.

바로 전 선달에게 그시절 님께서 흑으로 8집인지 지셨는지?

초반 몇 수를 진행하는데 답답한 방안보다 정원에 거대한 암반 평상이 있으니 그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에 용 모습이 부조된 묵직한 통 바둑판을 힘겹게 들고 옮겨 자리를 잡는다.

다시 몇 수를 진행하는데 서울로 출발하는 일부 인원과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다.

반상의 모습은 좌변 흑세 속의 백의 일단이 죽으면 부족하고 살면 흑이 던져야 되는 상황인데 곁에서 관전하던 이청 선생에게 자전해설 생중계에 바쁘던 선달아우가 수순을 바꿔 묻고 가야 하는 자리를 잊어 백이 간단하게 살아버리자 투석을 한다.

암반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니 상산사호는 아니어도 소주잔과 물회에 더 부족한 것이 없으니 이곳이 도원경이라. 이청 작가께서 漢詩(한시) 원문 시제를 주시며 나작 글벗들의 시도를 격려하실 때 그려보던 도원경과 詩(시)속 세상이 이런 곳이 아닐런가?

다시 떨어지는 빗방울에 드럼통을 반을 잘라 만든 바비큐 통을 정자 안으로 옮겨 숯불을 피우고는 선비만석님이 준비해놓은 생 삼겹살을 굽는다. 화진포서 돌아올 때 들린 슈퍼에선 주인장이 소주 한 박스를 협찬하시고 첫날 회집주인께서 수박을 보내셨단다. 태평역 님은 슈퍼 계산을 대신 하시고, 훈훈한 인심들과 깊은 속 정에 바비큐 통 숯불의 열기도 무색해진다.

(2/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