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펄 끓어오르던 신열이 오후에는 좀 가라앉는가 했더니 밤이 되자 또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벌써 사흘째 동삼은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다.

이번 겨울과 그 후에 닥쳐올 춘궁기를 대비해 동삼은 지나치게 몸을 혹사했다. 무쇠로 만들어진 몸이 아닌 바에야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우리 집안이 누대에 걸친 종의 집안이었기에 스승께서는 이리도 냉담한 것인가.

앓아 누운 첫날, 동삼은 오히려 스승의 양식을 걱정했다. 둘째 날이 되자 자신이 앓아 누운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기척이 없는 스승이 원망스러웠다. 셋째 날에 이르러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오기가 일어났다.

도대체 스승은 왜 이렇게까지 나에게 냉담한가…….

그저께 텃밭에서 흙을 갈고 있을 때, 남루한 옷차림의 농부가 쌀 포대를 걸머지고 고가로 들어섰다.

「여기가 설숙 선생님 댁이시오?」

「그렇습니다.」

포대를 걸머진 농부의 얼굴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안에 기별을 좀 해줄 수 있겠소?」

「무슨 일이시오?」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소.」

농부의 집안은 대대로 화전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

20여 년 전 타성받이로 이곳에 흘러든 농부의 가족들은 설숙 집안의 야산에 터를 마련했다.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아갈 무렵, 농부의 아비가 죽었다.

농부는 설숙의 본가를 찾아가 본가의 야산에 아비의 묘를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집안 살림을 맡았던 설숙의 아우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야산을 개간해 살게 했지만 묘를 쓰는 일만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상복을 입고 문 앞에서 울고 있는 그에게 때마침 경성에서 내려온 설숙이 그 연유를 물었다. 그리고 설숙은 두말 없이 그 땅에 묘를 쓰도록 허락했다.

「그때 그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했소. 동생분을 나무라시며 하시는 말씀이, 땅 파먹고 살아온 사람이 땅에 묻히는 것을 막아서야 되겠느냐. 묘자리를 내주도록 해라. 그러시던 분이 이런 외진 곳에서 고생을 하고 계시다니…….」

스승을 보자 농부는 포대를 내려놓고 댓돌 아래서 넙죽 절을 올렸다. 농부는 스승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한참 후 농부가 동삼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다시 포대를 걸머지고 있었다. 어떻게 됐는지는 안 봐도 뻔한 사실, 동삼은 묵묵히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어른께선 이걸 받길 마다하셨지만 당신이라도 받아 두시오.」

「…….」

「그 어른께서 뜻은 고마우나 받은 걸로 치겠다고 하셨소. 얼마나 냉정하게 말씀하시는지, 찬바람이 쌩쌩 돌 지경이었소.」

집안에 있는 양식이라고 해야 감자 반 포대와 보리쌀 반 말 정도가 전부라는 데 생각이 미친 동삼은 마음이 심란했다. 그렇다고 스승이 거절한 재물을 냉큼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돌아가십시오.」

동삼은 농부를 외면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이구! 스승이라는 분이나 제자라는 사람이나!」

농부가 사라지자 동삼은 쟁기를 놓고 흙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지가 노곤하고 으시시 몸이 떨린다.

그날 밤부터 동삼은 아프기 시작했다. 사지가 뒤틀리고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사흘 밤이 지나 나흘째 새벽부터 신열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동삼은 이젠 허기와 갈증으로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아침이 되어 동삼이 지친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더니 스승이 들어섰다. 스승은 겉표지도 없는 낡은 바둑책 한 권을 동삼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들리는 스승의 싸늘한 목소리.

「이제 겨우 걸음마나 면한 주제에 그렇게 허약하다니…….」

스승의 발길이 멀어진다. 동삼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속에 오기와 투지가 일어났다.

그 사건을 계기로 동삼의 바둑은 한층 더 날이 섰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동삼의 기운과 평사의 기운은 기본 성격이 달랐다. 굳이 구분하자면 평사의 기운은 자객의 기운이었고 동삼의 기운은 정통 무사의 기운이었다. 동삼의 바둑이 일대 전기를 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설숙은 동삼을 모질게 다루었다. 때로는 동삼이 숨이 막혀 헉헉거릴 정도로 심하게 닦달했다.

「부동심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끝없는 수련 속에서만 사물을 구분하는 혜안이 생기는 법이다.」

근본 취지는 열심히 수련하라는 단순한 가르침이었으나 듣기에 따라 며칠 동안 앓아 누워 공부를 게을리한 데 대한 추궁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동삼은 스승과의 대국에서 기필코 이기리라 마음을 고쳐 먹는다.

설숙은 동삼에게 미묘한 승부의식을 느낀다. 근래 들어 더욱더 새삼스럽게 동삼과 바둑을 둘 때마다 평사가 의식되곤 한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평생 여목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아왔노라고 설숙은 자부했다. 그런데 왜 동삼만 대하면 이따금씩 그 아비 평사가 생각나고 이놈에게만은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때에는 평사가 동삼을 자기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여목 스승에게 맡기고 갔다는 턱없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설숙은 자신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나 싶어서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면서 설숙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평사가 동삼을 자신에게 맡기고 간 뜻을 설숙은 알고 있었다. 평사는 설숙을 믿었다. 평생 껄끄러운 관계였으나 그래도 평사가 안심하고 자식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 설숙뿐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그런 평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설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