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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회] 8부 대륙에 불어닥친 피바람 (1)

2007-04 조회 3606추천 0 프린트｜스크랩

위지손이 양해를 구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선생과의 대국을 두게 되는 것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그럼 사흘 후에 뵙겠습니다.」 나오는 길에 석정이 여목에게 물었다. 「어르신, 그 서신의 내용이 무엇일까요?」「…….」「혹시…… 어르신의 바둑을 언급한 게 아닐까요?」「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승부에 있어 궁극적인 우위는 그 수의 높고 낮음에 있지 기풍이나 기질에 좌우되는 건 아니오. 물론 사람에 따라 독특한 기풍이란 것은 있소. 세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저하게 실리로 파고드는 사람도 있고 전투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참고 기다리는 바둑도 있소. 두터운 행마가 있는가 하면 화려한 행마를 즐기는 사람도 있소.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서로의 상관 관계가 있으리라고 보오. 일반적으로 바둑을 인(忍)의 기도(棋道)라 했으니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다르오.」 석정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삼스러운 여목의 설명에 흥미를 느꼈다. 「어르신의 바둑은 스스로 보시기에 어떤 기풍을 지니고 있습니까?」「글쎄…… 거센 폭풍우를 만나면 천년 고목일지라도 부러지고 말지만 강가의 갈대는 휘어질지언정 결코 부러지지 않으니 그 부드러움을 배우라고 말들 하지요. 그러나 그 부드러움도 칼이라는 무기 앞에서는 찰나의 순간도 견디어 내지 못하오. 나무〔木〕는 쇠〔金〕를 만나면 지게 된다는 오행상의 진리 앞에 예외는 없소.」「…….」「조선의 바둑은 전통적으로 순장바둑이오. 순장바둑은 바둑판 위에 흑이 아홉 점을 놓고 백이 여덟 점을 미리 놓은 후 백이 먼저 착수하는 바둑이오. 순장바둑은 그 성격상 초반부터 전투가 벌어지기 쉽소. 나는 되도록 어떤 기풍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어릴 적 처음 바둑을 배울 때부터 순장바둑으로 익혀 왔으니 굳이 내 바둑의 성격을 이야기하라면 강한 전투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소. 전투가 강하다 함은 수를 읽는 깊은 눈을 가졌음을 의미하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고 있음을 말하오.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관조하는 지혜가 늘어나고 바둑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짐에도 불구하고 바둑이 쇠락해지는 것은 그 분별력이 흐릿해지기 때문이오. 어쨌든 그것만이 내 바둑에 대한 답은 아닐 것이오.」「결국 그 말씀은 어르신의 바둑에는 약점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그런 뜻이 아니오.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소. 바둑은 평생 자신의 약점을 없애는 과정이오. 그대의 눈에는 내가 중국 바둑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온 정복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게 아니오. 나는 바둑을 배우는 마음가짐으로 진실로 이 넓은 대륙에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오.」 석정은 여목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여목은…… 거인이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위지손은 여목으로부터 건네 받은 편지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여목이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편지 위에 적힌 조선이란 글씨 위에 한 인물이 겹쳤다. 그 사람은 늙고 병든, 그러나 일생 동안 자신이 흠모했던 스승 손일원(孫一園)이었다. 「청초(淸初)의 국수 귀견수(鬼見手) 평인준(平引俊)을 아느냐?」「예.」「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선의 바둑을 경계해라. 대륙의 바둑은 웅혼한 기상과 힘이 있다. 비유하면 운장의 청룡언월도와 같은 무게와 힘을 겸비하고 있다. 왜국의 바둑은 섬세하고 정교하다. 그러나 모양과 형태에 지나치게 치중하기 때문에 사리에 밝지 못하다. 말하자면 수리검과 같다. 조선은 다르다. 우리는 그들을 속방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들의 문화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독창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실로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이다. 그들은 모양과 세기를 겸비하지는 못했지만 전투적이며 무엇보다 수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며 실전적이다. 순장바둑이란 특성 때문에 취약한 부분이 있지만 바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수읽기를 받쳐 주는 힘과 세기를 조화시킬 수만 있으면 차후의 바둑은 그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조선은 강하다. 그들 자신이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것이다.」 명이 몰락하고 청나라 초기 암흑의 시대에 태어난 평인준은 어릴 적부터 바둑에 뛰어난 기재를 보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일곱 살 때 처음 바둑을 접한 이후로 기량이 일취월장하여 18세에 이르자 그가 살고 있는 호북성(湖北省)에서는 더 이상 적수를 만날 수 없었고 2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기품제일(碁品第一)로 불리던 명나라 고수 과백령(過伯齡)의 뒤를 이어 중국 전역에서 국수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이 넘어섰을 때 그는 사람들로부터 대국수(大國手)라는 칭호를 받았다. 청초의 문장가이며 바둑에도 조예가 깊었던 장문홍(張文弘)은 평인준과 한 번 대국을 가진 후 그의 수를 읽는 깊이나 수의 은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해 귀신같이 수를 본다 하여 그에게 귀견수(鬼見手)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부터 평인준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귀견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10년 동안 대국수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 평인준은 대륙에서 더 이상 적수를 만나지 못하자 일본으로 발길을 돌렸으니 때는 1714년 늦은 가을이었다. 당시 일본 바둑은 막부의 비호 아래 체계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바둑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바둑의 종가인 홍임보가(本因坊家)와 이노우에가(井上家), 야스이가(安井家), 하야시가(林家)를 주축으로 상호 견제 속에 숙원인 명인기소(名人碁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의 공식적인 일인자는 명인기소의 자리에 있는 도세쓰 인세키(道節因頭)였다. 일본에 도착한 평인준은 우선 도세쓰에게 여러 차례 면담을 요청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도세쓰는 평인준과의 면담을 회피했다. 서신을 보내도 회답이 없었고 몇 차례 직접 방문하기도 했으나 평인준은 도세쓰를 만나지 못했다. 평인준은 왜 도세쓰가 자신을 피하는지 그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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