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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회] 7부 구한말의 대국수 (5)

2007-04 조회 3360추천 0 프린트｜스크랩

상관숭의 승부수는 노골적으로 여목의 굴복을 강요하는 수였다. 반발하면 피바람이 일어날 것이고 굴복하면 승부를 떠나 치욕이었다. ‘그대는 참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반발해 올 것이다. 이제까지 접고 있던 나래를 펴고 날아 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아니 날아 오르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가 만약 대붕이면 나는 하늘이 될 것이다. 자, 여목 날아라. 날아 올라라.’ 상관숭은 내심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대붕은 날지 않았다. 그저 참을 뿐이었다. 상관숭은 그만 맥이 풀렸다. 대붕이 아니란 말인가? 아직 붕이 되지 못한 곤(鯤)인가?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곤이 변화해서 새가 되었다.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붕의 등은 또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한번 떨쳐 날면 그 날개는 하늘가 가득 덮인 구름과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여 큰 바람이라도 일게 되면 그 큰 바람을 타고 날아 남쪽 바다로 옮겨 간다. 남쪽 바다란 천지(天池), 즉 하늘의 못이다. 제해(齊諧)라는 괴이(怪異)한 것을 많이 아는 사람이 있다. 그 제해의 말인즉 이러하다. 붕(鵬)이 날아서 남쪽의 바다로 옮겨 갈 때면, 날개를 벌려 3천 리나 되는 수면(水面)을 치고, 그래서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에 날개를 떨치면서 곧장 9만 리 장천(長天)으로 날아 오른다. 이렇게 해서 날기를 여섯 달, 그제서야 비로소 날기를 멈추고 내려와 쉬는 것이다. 상관숭의 장고가 시작되었다. 10분, 20분, 1시간……. 이대로 가면 결국 패하고 말리라. 흑이 여러 번 굴복을 했으나 결정적으로 승부를 뒤집을 만한 곳은 없었다. 판의 형상이 애당초 흑 쪽으로 굳어져 있었다. 방 안에는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여목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상관숭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나에게 굴복을 강요한 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 주는구나. 아직도 백이 둘 여지는 남았지만…… 계속 둔다는 것은 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상관숭은 조용히 돌을 거두었다. 불과 120수의 단명국이었다. 「귀인, 제가 졌습니다.」 여목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리고 반상 위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별 말씀을, 오히려 제 배움이 컸습니다.」 그것이 여목의 중국 대장정 두 번째 승전보였다. 북경은 큰 도시였다. 그 큰 도시가 온통 세모의 열기 속에 파묻혔다. 곳곳에서 축포를 터뜨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섣달 그믐날. 해가 바뀌게 되면 조선 국치의 원년이 된다는 것을 여목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상관숭과의 두 번째 대국에 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상관숭의 흑번 여목의 백번이었다. 선착의 효를 끝까지 지키자. 이것이 상관숭이 대국에 임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불과 40여 수 남짓밖에 두어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상관숭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여목의 기풍은 첫 대국 때와는 너무도 판이했다. 첫 대국 때는 돌의 자생력을 염두에 두는 두터운 바둑이었으나 지금은 완연히 달랐다. 처음의 기풍대로라면 당연히 받아 줄 것으로 생각되는 곳에서도 백은 연거푸 손을 빼며 발 빠른 포석을 전개했다. 바둑의 형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바둑은 난전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누가 얼마나 정확하게 수읽기를 하는가에 승부가 달려 있었다. 이런 바둑이라면 선착의 효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상관숭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자세를 바꾸었다. 살얼음판을 딛는 난전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한 수만 삐끗해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실전적인 수는 처음이다. 때로는 빈삼각의 우둔한 형태를 서슴없이 둔다. 또한 두점머리 석점머리를 자청해서 맞기도 한다. 이 사람의 이 눈부신 행마는 도대체 어디서 습득했을까? 이 자유자재함은 또 어디서 온 것인가?’ 상관숭의 이마에서 땀이 진득하게 배어 나왔다. 그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여목을 보았다. ‘아! 이것이 이 사람의 진면목이었구나! 전에 내가 언뜻 느낀 이 사람의 바둑은 환각이 아니었구나.’ 상관숭은 변발을 해서 땋아 내린 자신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다. 그는 보았다. 장엄한 여목의 기(氣)를……. 그 기는 여목의 혼을 실은 듯 거대한 힘이 실려 있었고, 상대를 제압하는 추상 같은 모습은 마치 하늘의 부름을 받고 지상에 내려온 신장(神將)의 형상이었다. 바둑은 중반전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판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하였다. 사귀를 제외하고 전판이 전장으로 화해 있었다. 여목이나 상관숭이나 서로 시간을 물 쓰듯 써 가며 수읽기에 골몰했다. 아침 나절에 시작한 바둑은 삼경이 가까운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승부가 나지 않고 있었다. 관전하는 석정의 가슴도 바작바작 타 들어갔다. 흑이 한 수를 놓으면 전투에서 흑이 유리해 보이고 백이 한 수 놓으면 백이 유망하게 보였다. 석정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낼 수 없었다. 한쪽은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중원을 대표하는 손꼽히는 기사로서 비공식적이나마 나라의 자존심을 등에 짊어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관숭은 석정이 북경에 온 이래로 그녀에게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50여 수가 두어졌다. 바둑은 중앙에서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상변에서 중앙으로 중앙에서 다시 우변으로 그런가 하면 좌변과 중앙에 걸친 접전도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였고 하변 쪽도 결과를 뒤로 미뤄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종반에 이르러 여목의 수읽기는 상관숭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난마처럼 얽혀 있던 치열한 전투가 여목의 완벽한 수읽기로 인해 여목의 절대 우세로 바뀌었다. 어찌 보면 상관숭은 처음부터 여목의 상대로선 미흡했다. 북경의 최고 고수라 하나 그의 전성기는 이미 지났고, 그에 비해 혈기왕성한 여목의 기백을 감당하기에 그는 너무 노쇠했다. 상관숭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타협을 할 수도 전투를 계속할 수도 없었다. 상관숭은 입술을 깨물며 중앙 백돌에 대한 봉쇄의 수를 던졌다. 여목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관숭의 대마를 양단시켰다. 예정된 수순에 의해 서로 수를 조여 들어가자 결국 상관숭의 대마가 한 수 부족으로 몰살했다. 정확히 28수 후의 결과였다. 상관숭은 자신의 대마가 몰살한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바둑을 두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때로는 강태공과 같은 끈기의 기다림으로,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갈고 닦은 맹장의 모습으로, 때로는 하늘을 날으는 매와 같은 예리함으로……. 그의 진면목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상관숭은 불가사의한 눈으로 여목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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