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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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21회] 5부 잊혀진 내기꾼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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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이 넘도록 김헌자 사범은 나타나질 않았다. 더 기다려도 김헌자 사범이 오기는 글렀고 내일 다시 와 볼 요량으로 기원에서 나온 박 화백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 잔 마신 후 여관으로 들어갔다. 사직공원 근처 여관은 박 화백이 광주에 오면 가끔 묵고 가던 곳이었다. 훈기가 도는 방 안에 들어서자 포장마차에서 마신 소주의 기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샤워를 하고 박 화백은 잠자리에 들었다. 몸이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잠이 쉽게 오질 않았다.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든 박 화백이 얼마 안 있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바둑돌 놓는 소리였다. 박 화백은 환청일 거라 생각했다. 추동삼에 쫓기다 보니 꿈에서까지 바둑이 나타났으리라 생각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또 그 소리가 들려 왔다. 분명히 바둑돌 소리였다. 박 화백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소리는 선명하게 벽을 뚫고 들려왔다. 소리는 시간을 두고 계속 들려 왔다. 전에도 이 여관에서 바둑 두는 소리를 간혹 들은 적이 있었다. 소리는 정확했고 한치의 틈이 없었다. 반상 위로 떨어지는 소리는 일고의 흔들림이 없는 완벽한 착수였다. 박 화백은 그 완벽한 소리에 강한 유혹을 받는다. 이런 시각에 여관방에서 벌어지는 대국은 분명 승부바둑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박 화백의 마음은 벌써 옆방에 가 있다. 박 화백은 참다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때 마침 여관 주인이 야식을 들고 그 방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여관 주인은 대단한 바둑광이었다. 여관방마다 텔리비전을 틀면 바둑 프로가 먼저 나오게 채널을 고정시켜 놓을 정도로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박 화백은 안면이 있는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주인은 박 화백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박 화백은 주인을 따라 그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한 판의 바둑을 관전하고 있었다. 바둑은 이미 중반전이 넘어서고 있었다. 흑을 쥔 사내가 착수를 했다. 백을 쥔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반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둑의 모양새로 보아 박 화백의 예상대로 엄청난 고수들의 바둑이었고 그의 형세 판단으론 미세하나마 백 쪽이 두터워 보였다. 구경꾼들이 연신 담배를 피워 댔다. 그들은 아마 직, 간접적으로 이 판에 관련이 있는 자들일 것이다. 박 화백은 묘한 향수에 젖어든다. 언제였던가, 젊은 시절이었으리라. 자신도 이런 곳에서 승부를 했었다. 이 기원 저 기원 여러 도시를 흘러 다녔다. 돌이켜보면 외롭고 아픈 날들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흘러 다닌 정처 없는 나날이었다. 잠시 후 백을 쥔 사내가 착점을 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박 화백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내는 뜻밖에도 노인이었다. 정확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으나 연로한 늙은이였다. 노인의 얼굴은 깡말랐고, 약간 비뚤어진 턱에 착점하는 손가락은 길숨길숨했다. 노인의 바둑은 탁월했다. 한 수 한 수마다 승부의 연륜이 강하게 묻어 나왔으며 고수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노인의 바둑은 평범한 고수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노인은 바둑을 둔다기보다 흡사 숙련된 보일러공이 보일러를 놓듯 일상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승부를 목전에 둔 사람치고는 너무나 태연자약 했다. 그러고도 노인의 한 수 한 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저 나이에 어떻게 이런 바둑을 둘 수 있단 말인가……. 박 화백의 마음에도 감동 같은 것이 지나간다. 정명운 국수에게 느꼈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승부사의 모습이었다. 어느 틈엔가 박 화백은 김헌자 사범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 혹시 김헌자 사범이 아닐까 생각하니 박 화백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저 나이에 그만한 바둑을 둘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추동삼과 양포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가 최고의 바둑이라 하질 않았던가. 박 화백은 저 노인이 틀림없이 김헌자 사범일 것이라 생각한다. 전라도 순천(順天)이 고향인 김헌자. 고령의 노사초(盧史礎)가 맨발로 쫓아 나와 맞이했다던 호남 국수 이재사(李裁査)가 어릴 적 김헌자의 바둑을 보고 한눈에 명인의 재목이라고 격찬했던 일화가 있었다. 그 일화에 걸맞게 그는 지금 한 판의 바둑을 완벽하게 닦아 내고 있다. 바둑은 끝내기를 몇 군데 남겨 놓았고 백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박 화백은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여관 주인을 통해 자신의 짐작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헌자 사범이라고 노인네지만 왕년에 한 수 보던 바둑이었지라. 지금 같이 두는 젊은 사범을 두 점이나 접어 벌써 며칠째 승부를 하는디, 젊은 사범이 판 맛을 못 보는구마이라. 현역 전문기사들도 젊은 사범에게 두 점은 없다고 그러던디…… 참으로 겁나는 바둑이지라.」 박 화백은 김헌자 사범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와 그간 김 사범을 찾기 위해 여러 도시를 헤매고 다녔던 일 등을 대충 설명했다. 김헌자 사범은 겉보기와는 달리 자상했다. 김 사범의 추동삼에 대한 회고는 송 영감 이야기의 다음 부분이었다. 「양포가 죽고 난 뒤에도 추 사범은 간혹 모습을 보이곤 했네. 양포의 죽음이 추 사범에게 적잖이 충격을 줬을 거야. 한번은 청계천인가 어디에서 바둑을 두는데, 그곳으로 누군가가 추 사범을 찾아왔어. 나중에 물어 보니 옛날에 같이 바둑을 배운 동문이라 그러더구만. 대국을 하다 말고 밖으로 나가서 한참 후에야 추 사범 혼자 돌아왔어. 그때 추 사범의 안색이 이상했어.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네. 바둑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보였어. 대국이 끝나고 술을 마셨네. 그 자리엔 황판수란 친구와, 전문기사였던 정천명 5단이 같이 있었지. 원래 말이 없던 그였으나 그날은 유독 말 한 마디 없이 술만 마시더군.」 「혹시 그때 찾아온 사람이 정명운 국수가 아닙니까?」 「정명운 그 사람은 아니었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같은 동문이었던 사람으로 추동삼을 찾아온 사람이, 기보에 입회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최해수란 사람인가……. 박 화백은 김헌자 사범을 쳐다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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