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바리

서초동 법원 뒤편의 노래방은 성업 중이다.

지하에서 계단을 올라 밖을 보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전철역까지 걸어서는 먼 거리이고 비까지 뿌리니 버스를 타며 “이 차 어디로 갑니까?”묻는다.

내일 아침 6시까지 조출(조기출근)하려면 평소 3시 반에 기상이고 일찍 잤는데 회식으로 너무 늦었다. 1차의 삼겹살에서 9시경까지 오래 지체하곤 다시 노래방이었는데 끝날 기미가 안 보여 먼저 슬며시 나왔다.

본사 대표와 간부들 병원 총무 팀의 팀장과 간부들 20명 정도 모인 자리는 두 주인공을 위한 법석마당이다.

무작정 올라탄 버스는 마침 가락동 방향이다. 강남의 아파트 단지들을 이리저리 돌아 가려면 오래 걸리겠지 싶어 내려 전철을 탄다. 빨리 가서 조금이라도 더 자고 출근해야지.

“총무 팀은 선남선녀들만 뽑나 봐요?”

자리를 돌아가며 앉아 연신 술을 돌리는 젊은이들 중 마침 총무 여직원이 건네는 술은 잔만 받아 내려놓은 채 묻는다. 서로서로 술잔을 돌리는 탓에 이미 모두들 상당히 취한 것 같다. 내가 젊은 시절 회식 때도 저렇게는 안 했었는데 싶다.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아 고개를 뒤로 돌려 마신 후 바로 휴지로 잔을 닦아 상사에게 권하는 모습은 과거의 잔재일 것 같은데 이제 대학 졸업 후 병원에 입사한지 3개월 됐다는 청년은 끝없이 권하는 술을 다 받는다. 여직원들은 걱정스러울 만치 엄청나게들 마신다. 술 맛을 모르거나 술 취한 후의 후유증들을 아직 젊어 겪어보지 못해 술 무서운 줄 몰라 저러는 것일까? 내 자식들도 밖에서 저리 심하게 마실까 걱정이 된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여 바깥문을 열고 안 유리문을 열려니 키가 없다. 두 개의 키 중 한 개를 잊고 병원옷장에 두고 온 것이다. 늦은 시각에 용인까지 갔다 내일 조출을 할 수도 없고 고민하다 우선 설렁탕 집에 가 배를 채운다.

내주부터 약간의 인사 변환배치가 있어 당사자들을 면담하느라 회식시간에 늦어 서둘러 옷을 갈아 입느라 키를 잊었다. 자리 바꿈이 각자에게는 중요한 일이고 급여의 과소에도 영향을 미치니 민감하게들 반응한다.

회식 자리에는 보안 팀의 소장도 초대받아 왔다.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상관없긴 하나 자리의 의미가 무엇일까?

같은 총무 팀 소속이니 교류를 원활히 하라는 취지일까?

병원 전체의 보안 중 응급실은 S사 에서 새로 맡아 운영하며 가톨릭 계열 8개 병원 중 보안 팀을수원의 ㅂ 병원은 S사에서 맡았다던데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전혀 언급이 없다. S사 와 우리회사가 같은 계열 인 것은 모두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잔을 사양하면 결례로 여길까 두려운지 모두들 부지런히 마신다. 이미 다들 상당히 취했다.

마지막 인사말을 부탁 받은 본사 대표는 잠시 좋은 말구 를 생각하시는 듯 한데 박 반장이 나서며 자신이 인사말을 마무리하겠다 청하곤 “건배 대 삼성병원을 위하여”라고 외친다. 모두 머쓱하여 쳐다보며 쳐든 잔을 내리지 못하자 다시 “C병원을 위하여!”라고 선창한다.

설렁탕으로 배를 채우며 소주를 한 잔 마시며 지난 저녁을 돌이킨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정말 소란스러웠던 술자리는 술도 몇 잔 안 한 채 남들 취한 모습만 실컷 구경하고 노래방의 소음 속에선 탁자 위의 맥주 컵에 눈길이 갔었지만 젊은이들이 먼저 손대 맛도 못 보았다. 배고프고 술 고프고 그저 내 돈 만원이면 족한 것을 오피스텔 근처 내 나와바리 여서 더 마음이 편한 것일까?

이제야 아까부터 궁금했던 이유가 생각이 난다. “왜 저렇게 술들을 많이 마시고 무릎을 꿇고 받을까?”

여러 해 전 S병원 바둑동호회의 모임에 처음 갔을 때 회식 자리에서 당시 레지던트 4년 차 인 젊은 닥터가 내가 따라주는 잔을 무릎을 꿇고 받길래 내가 오히려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바둑동호회에선 사범 이어서 라기보다 닥터 교수들에게 술을 받을 때 습관이었겠지. 병원에서의 회식이 도제제도의 상하가 분명하여 그 관습이 일반행정의 총무에서도 의례적으로 따라 하게 되었나 보다.

7기 미얀마 팀의 해외의료봉사를 마친 후 상일동의 오리집 에서 팀원들과 회식을 하고 강남의 카페에서 2차를 한 적이 있었지. 젊은 닥터들이 따라주는 잔을 호쾌한 기분으로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술을 권하지는 않았다. 카페에선 폭탄주를 열잔 이상씩 들었지. 그래도 폭탄주의 술 맛은 싱거운 듯 했다. 미얀마 고산지대 소수민족의 찹쌀로 직접 빚은 하얀 백주는 오래 재사용하여 거뭇거뭇한 페트 병 속에 담겨있어도 담백한 70도의 맛은 잊지 못했었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