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승부는 나에게 맡겨 주시오.」

동삼의 말에 권 원장이 주춤했다. 진지하고 자신 있어 보이는 동삼의 제의에 권 원장은 한때 이 기원을 들락날락하던 한 떠돌이 내기꾼이 생각났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기원에 들러 잔돈을 뜯어 가던 그는 옛날엔 알아주던 고수였다. 동삼이 기원에 온 지 며칠 후 월례행사로 찾아오던 그가 나타났다. 동삼을 발견하자 그는 매우 당황했다. 그날 그 내기꾼은 평소와는 달리 일찍 기원을 나갔다. 나가면서 그는 동삼에게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 내기꾼은 동삼보다 훨씬 연상이었다.

한참 동삼을 빤히 주시하던 권원장이 이윽고 결심한 듯 자식에게 일렀다.

「돌아가거라.」

준모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동삼을 바라보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권 원장도, 동삼도, 준모도 짐작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이 준모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후일 성공적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준모는 그 기량이 일취월장하여 훗날 한국바둑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된다.

만일 그때 동삼이 준모 대신 나서지 않았다면, 어쩌면 준모는 내기바둑판을 전전하다 스러지는 이름 모를 야생화의 일생을 살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운명이 동삼의 개입으로 비껴 나간 것이었다.

승부에 걸린 액수는 500만 원으로 합의를 봤다. 이 사장과 권 원장은 동삼이 들어서자 다시 상황 정리를 했고, 그리고 장고 끝에 마지막으로 동삼에게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어차피 준모가 나서더라도 천하의 마포 장을 상대로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고, 신뢰가 가긴 하나 동삼 역시 그를 잡는다는 확신이 없었다.

권 원장의 판단으론 이미 마포 장을 상대로 본전을 찾기는 힘들었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동삼을 믿고 한꺼번에 베팅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장과 만나 며칠 상의한 끝에 이 사장의 건물을 담보로 거액 500만 원을 사채로 마련했던 것이다.

동삼과 마포 장의 바둑은 그런 복잡한 인간 관계가 얽힌 가운데 시작되었다. 돌을 가려 흑을 잡은 동삼은 막상 대국이 개시되자 초반부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기차게 마포 장을 밀어붙였다.

바둑을 두는 마포 장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가 누구든 개의치 않고 승부에 임했던 마포 장이었다. 언제나 자신감에 넘쳤던 마포 장은 태어나서 처음 바둑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으스스한 공포를 느낀다.

‘끔찍하다. 세상에 무슨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있는가.’

마포 장은 대국 도중 흘깃흘깃 동삼을 훔쳐본다.

‘도대체 이놈이 누구란 말인가.’

권 원장이 500만 원을 제의했을 때 마포 장은 이 판을 마지막으로 이곳을 뜰 요량이었다.

마포 장의 계산으론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대국에서 패하는 것은 논외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면서 지금 상황은 거꾸로 덜미를 잡히는 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중반이 넘어서자 마포 장은 여기저기 승부수를 띄운다. 그러나 그의 승부수는 동삼의 철저한 응수에 의해 속속들이 무산되고 바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고 만다. 마포 장은 진퇴양난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른다. 마포 장의 머리가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상하다, 이 자의 바둑은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한 수많은 바둑들과는 그 기운부터가 다르다. 양포와 대등한 실력으로 평가받았던 대승부사 손명박이와 힘겨운 승부를 할 때 느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과도 전혀 별개다. 도대체 수(手)의 행방이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말 이 자는 누구란 말인가.’

마포 장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불리한 형태에서 안간힘을 써 본다. 그러나 반전의 구도로 행마의 방향을 틀면 틀수록 판은 좁아진다.

‘세상에 이런 일이……이렇게까지 우롱을 당할 수 있다니…….’

승패가 가까워지자 마포 장은 얼이 빠진 채 반상을 쳐다본다.

장막 속의 인물로 떠돈 지 십수 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해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던 마포 장은 완벽한 동삼의 바둑 앞에 쉽게 둥지를 떠난다.

마포 장은 승패를 떠나 습관적으로 몇 수를 반상 위에 놓아 본다. 승패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스스로의 패배를 확인하는 절차만 남아 있다.

동삼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없다. 패자의 곤혹스런 모습보다 이긴 자의 무덤덤함이 보기에 따라 더 이상하다.

이제 마포 장은 두는 걸 포기하고 하염없이 바둑판만 내려다본다. 바둑을 둔 지 한나절, 흑을 쥔 동삼이 초반부터 숨쉴 틈 없이 일사천리로 밀어붙여 바둑은 100여 수 만에 승부가 끝나 있었다.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천하무적 마포 장의 바둑이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명성과 아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권 원장은 얼이 빠진 마포 장을 바라보며 마포 장 이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물론 한가닥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권 원장은 이겼다는 안도보다 그간 마포 장에게 시달려 온 고통이 일시에 풀리면서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바둑은 끝이 났다. 동삼의 불계승이었다.

이틀 후 늦은 밤.

기원 사람들이 모두 잠든 시각에 동삼은 몰래 기원을 빠져 나왔다.

거리에는 어둠이 드문드문했다.

맞은편에서 이필상이 흐느적흐느적 걸어온다.

「추씨, 어딜 가시오?」

취기가 가득한 이필상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가물가물한다.

동삼은 이필상과 작별하고 횡단보도 건너 역 쪽으로 걸어간다. 뒤에서 술 취한 이필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잘 가시오, 추 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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