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자정이 넘은 시각.

동삼은 행랑채 밖 평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달빛이 고가의 구석구석을 훤히 비췄다.

모두가 졌다. 어쩌면 도장의 존폐가 걸릴지도 모를 일대 사건이었다.

나라도 한번 나서 보는 건데 안타깝다.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승부를 한번 해 봤어야 했는데……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야 하다니…….

동삼의 내부에서 승부의 욕구가 불쑥불쑥 솟구친다.

지금이라도 한번 승부를 제의해 보면 어떨까.

그러나 동삼은 이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대결을 거론할 때부터 자신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한 판에 정명운과 최해수가 무너졌으니 이 마당에 자신이 임의로 나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스승의 허락 없이는 그들과의 대결이 불가능했다. 동삼은 설숙 스승이 계신 안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이 꺼진 스승의 방은 고요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불쑥 설숙 스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은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꼿꼿하게 동삼 앞으로 걸어왔다. 동삼은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한 울타리에 살면서도 이렇게 마주한 지가 1년이 넘었다.

설숙이 동삼을 노려본다. 동삼은 스승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 자세로 한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숙이 침통하게 동삼을 향해 한마디 일침을 놓았다.

「너는 내 제자가 아니더란 말이냐!」

나직하나 칼칼한 스승의 말이 어둠 속에서 뇌성처럼 떨어진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스승의 느닷없는 책망에 동삼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두 사람을 에워싼다. 이글이글 불타는 설숙의 눈이 똑바로 동삼을 노려보고 있었다. 동삼의 마음속에 어떤 아픔이 지나간다. 선택받은 것도 아니고 버림받은 것도 아닌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가슴속으로 치밀어 온다.

스승은 안채를 향해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스승이 사라진 텅 빈 마당에 동삼은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정리하던 김재석 일행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동삼이 들어섰다.

「상대가 아직 남았소.」

「누구시오?」

아카기가 동삼에게 물었다.

「나도 이 도장 문하생이오.」

아카기와 시마즈가 동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허수룩한 복장하며 초라한 모습이 영락없는 일꾼이었다.

「이 사람도 이 도장 사람임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김재석이 동삼을 소개하다가 말고 말끝을 흐린다. 김재석의 그런 행동 이면엔 둬 봐야 결과는 뻔하다는 뜻이었고 굳이 둘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이 도장 사람은 누구라도 좋으니 상대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한 그들이었다. 그들은 방 한구석으로 가더니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이윽고 시마즈가 나섰다.

「좋소. 이 도장 사람이라 하니 내 상대해 드리지. 대신 지금 바로 시작합시다.」

원래 한 판을 둔 다음, 승자는 하루 휴식을 취하자는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시마즈가 바로 승부를 제의해 온 것은 어차피 승부는 자명한 것, 빨리 승부를 보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도였다.

「알겠소.」

동삼이 차갑게 말하며 돌아섰다.

별안간 장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백을 쥔 동삼의 들여다본 수가 그 원인이었다. 절묘한 시기와 상황이 맞물린 빛나는 한 수였다. 그 수는 손을 빼고 상변 큰 곳으로 달려갔던 시마즈의 작은 실수를 통렬히 문책하고 있었다. 집으로는 그리 크다 할 수 없지만 허술해 보였던 하변의 백진이 안정을 찾아 그 효과는 엄청났다. 게다가 흑을 쥔 시마즈의 미구에 있을 응수타진을 역으로 해소했을 뿐 아니라, 작지만 그런 대로 근거가 마련되는 의미가 있는 수였다.

시마즈의 이마에 진땀이 확 배어 나왔다. 시마즈는 통분의 심정으로 반상을 노려봤다.

고수다.
김재석의 기억은 그 옛날의 기억이거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전형적인 농부와 같은 분위기, 땀에 절은 허수룩한 옷차림 때문에 쉽게 본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이런 고수에게 왜 주의를 게을리했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자가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시마즈는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본 곳을 이었다. 그 한 수의 교환으로 바둑은 근소하나마 백의 우위로 돌아섰다. 시마즈의 낙승을 예상했던 모든 사람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바둑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둑이 시작될 때만 해도 명운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패한 시마즈를 상대로 동삼이 어쩌랴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도장으로 돌아온 이래 동삼의 바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백을 쥐고 한계가 있을 거야…… 저러다가 지겠지…… 저러다가 결국 무너질 거야.’

굳이 무너지는 걸 바란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명운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승부의 귀추를 주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면 갈수록 동삼의 바둑엔 힘이 실려 보였고 시마즈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70수가 넘어가면서 백의 우위는 여전했다. 솔직히 그 상태에서는 명운 자신이라 할지라도 백을 잡고 싶었다. 집으로는 윤곽이 불분명하나 뭔가 모르게 백이 두텁게 기분 좋은 모양새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터움을 지향하는 동삼의 기풍은 변화가 없었다. 원래 동삼은 잘 무너지지 않는 튼튼함은 있었지만 끊임없이 흔들어 대면 더러는 휘청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동삼은 흔들리지 않는다. 판 위에 돌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금성철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완벽한 수읽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삼의 놀라운 변화에 충격을 받은 명운은 고심참담한 지경에 빠졌다. 동삼이 그토록 성장할 동안 자신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명운은 그때까지도 동삼의 기풍 그 일면만 들여다봤을 뿐이었다.

바둑은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때 동삼의 한 수가 좌상귀 흑진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수는 매우 미묘한 착점으로 정체가 모호했다. 시마즈는 심각한 얼굴로 담배를 빼물었다. 그리고 불을 당기는 것도 잊은 채 반상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굴복을 강요한 수다. 미끼가 분명한데 아주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차단을 하여 승부를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피차간에 큰 모험이다. 미끼를 물면 그 사석을 대가로 백은 좌상변 쪽에 단단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상변의 두 칸 벌린 흑말이 허약해진다.

시마즈가 오랜 장고에 들어갔다. 한 수에 무려 두 시간을 소비한 시마즈의 응수는 탁월했다. 이쪽 입장과 저쪽 입장을 모두 고려한 절묘한 수습책을 내놓은 것이다. 시마즈는 동삼에게 요구했다.

‘어떡할 것이냐. 이 상태에서 서로 한 발씩 양보할 것이냐, 아니면 절단하여 여기서 승부를 볼 것이냐.’

동삼은 조용히 백돌을 들어 반상에 놓았다. 타협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몇 수가 지나자 바둑은 자연스레 동삼 쪽으로 기우는 느낌이 든다.

중반에 접어들어 바둑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최해수가 좌중의 의견을 물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소. 적당한 시점에서 봉수를 하고 내일 두는 게 어떻겠소?」

「계속 이대로 둬 승부를 가렸으면 합니다만…….」

시마즈는 내친 김에 승부를 가리고자 했다. 동삼은 아무런 대꾸 없이 백돌을 들어 한 수 착수했다. 무언의 승낙이었다. 봉수를 하고 두는 것이 상례였으나 쌍방이 봉수를 마다하고 대국을 계속할 만큼 두 사람의 입장은 비장했고 관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이 판은 한국과 일본의 사활이 걸린 절체절명의 승부였다.

동삼의 바둑을 보며 최해수는 원인 모를 감동에 젖어 들었다. 어이없게도 동삼을 간과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스승과 더불어 보낸 동삼의 지난 몇 년 세월이 눈앞에 선했다. 이미 동삼의 바둑은 확실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정한 선을 넘지 않으면 불가능한 수의 영역이었다. 그런 바둑을 구사하면서 잡다한 집안일에만 매달려 있는 동삼이 새삼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루가 꼬박 지나 이틀째 접어들면서 반상 위엔 서서히 승부의 명암이 드러났다. 전세를 만회하려 시마즈는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며 끈질기게 추격해 왔다. 유리한 바둑을 지키려고 동삼은 동삼대로 필사적으로 시마즈의 추격을 봉쇄하고 승세를 구축했다.

그렇게 쫓고 쫓기기를 온종일, 바둑은 다시 자정이 넘어 끝이 났다. 꼬박 이틀, 만 40시간에 달하는 긴 승부였다. 흑 57호, 백 54호. 흑이 덤 4호 반에 걸려 백을 쥔 동삼의 1집 반 승이었다.

시마즈의 충격은 컸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바둑에서 방심 아닌 기량에 의해 무너졌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시마즈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며 아카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료의 패배에 아카기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주위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이 엄청난 결과가 믿기지 않는 듯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얼어붙은 정적을 깨고 최해수가 방문을 박차고 대청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한시라도 빨리 이 결과를 스승에게 알려야 한다.’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생각밖에 없었다. 한달음에 내달아 최해수는 스승의 방 앞에 도달했다. 그 늦은 시각까지도 스승의 방은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아! 스승은 절실하게 동삼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구나!’

가슴 저릿한 감동에 최해수는 앞뒤 없이 스승의 방문을 와락 열어젖혔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서 스승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 옛날의 태산 같은 기백은 어디로 가고 초췌하고 늙은, 시든 얼굴이 가슴을 친다.

「스승님!」

최해수는 그 자리에 쓰러져 목이 메인다.

「집 반을! 집 반을!」

말을 맺지 못하고 최해수가 흐느껴 운다.

설숙의 눈자위가 미미하게 떨린다. 꽉 움켜쥔 그의 손에서 호두알이 으스스 깨어져 바닥에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