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설숙은 낮에 박갑수가 둔 기보를 들여다보며 비록 승부에서는 졌지만 초반의 화려한 포석을 보고 내심 흐뭇했다.

하긴 박갑수도 여목 스승의 적손이 아닌가.

설숙은 박갑수의 바둑에서 동설의 향기를 맡으며 그 옛날 동설의 바둑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그 얼마나 신출귀몰하고 자유자재하였던 동설이던가……. 여목 스승이 타계한 뒤 같이 도장을 일으켜 세우자고 한사코 그를 붙잡았으나 동설은 끝내 자신의 뜻을 뿌리치고 도장을 떠났다. 후일 개원을 통해 그의 안부를 간간이 접했지만 그가 도장을 떠난 후로는 결국 한 번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호남 국수 이재사가 자신에게 흑으로 무릎을 꿇은 뒤 말했다.

「조선에는 두 국수가 있으니 그 모두가 여목 선생의 제자로소이다. 수년 전 여목 선생의 애제자 중 한 사람인 동설 국수에게 오늘처럼 패퇴했소이다. 내가 그의 기예를 칭송했더니 그가 말하길 자신과 같은 동문 중에 설숙이란 당대의 기객이 있노라며 그 칭송을 선생에게 돌리더이다. 과연 여목 선생은 당대의 거목으로 추앙받아 마땅할 것이외다. 오늘에사 왜 저의 스승이 여목 선생 타계 후 낙향하여 칩거했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소.」

그리고 이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숙에게 큰절을 했다.

평사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기예의 겨룸이 만만찮았던 동설. 문득 젊은 시절 여목도장에서의 일들이 떠오른다. 동문들과 어울려 수양버들이 늘어진 그늘 아래서 기예를 연마하고 좌선(坐禪)에 몰입해 있을 때 선선히 귓전을 스쳐 가던 바람. 불현듯이 고향에 계신 조부가 보고팠고 어린 시절 뛰놀던 산 아래 실개천이 생각났다.

스승의 가르침이 뼛속 깊이 새겨질 땐 얼마나 충만감에 마음이 부풀었으며 하루 해가 지는 도장의 저녁놀은 또 얼마나 그립고 설레이던지.

그러나 다 가고 없다. 인자하던 스승의 얼굴도. 가슴을 저미는 바람소리도. 늦은 밤 구슬피 울던 밤새소리도…….

스승도 만년에 그랬을까.

설숙은 여목 스승을 생각하며 생(生)의 외로움을 느낀다.

그 시각 최해수는 우연히 김재석과 시마즈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대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자네 말만 믿고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예상보다 너무 기력이 허약하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상대한 친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최종 주자인 최해수 선배는 몰라도 다음 번에 상대할 정명운 그 친군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같이 공부할 때 솔직히 말해서 한 번도 시원하게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동안 제가 바둑이 늘었다고는 하나 그 친구도 그냥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아마 좋은 승부가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작 한 명이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한 판도 두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갈지 모르겠는걸.」

「뭐가 걱정입니까. 그리만 되면 그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웬만해서는 흥분하지 않는 최해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격노했다. 한 스승 밑에서 수업을 받은 자의 언행치곤 너무나 괘씸했다. 어쨌거나 김재석은 과거 같은 설숙도장에서 한솥밥을 먹은 동문이었다. 대형격이어서 최해수를 맨 뒤로 돌리긴 했지만 이제 믿을 만한 주자는 정명운밖에 없었다.

대국이 시작되자 김재석 흑, 정명운 백번이었다.

일본 가기 전만 해도 김재석은 정명운에게 선으로도 승률이 좋지 못했다. 그런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김재석은 거의 정명운에 버금 가는 바둑을 구사했다.

김재석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정명운이라고 하세월 그냥 보낸 건 아니었다. 더구나 정명운의 바둑은 한창 물이 올라 있는 터였다. 백을 쥔 정명운은 초반부터 실리를 챙기고 긴 바둑으로 몰아 나갔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바둑이 전개되었다. 흑이 한 수를 놓으면 김재석이 유리해 보였고 백이 한 수를 놓으면 정명운이 유리해 보였다.

중반에 들어서며 명운의 눈부신 행마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량 면에서는 명운이나 김재석이나 별 차이가 없었지만 승부 감각에 있어서만은 명운이 확실히 한 수 위였다.

바둑이 종반에 접어들어 백의 유망한 형세로 서서히 변모한다. 그대로 계가를 하면 아무래도 흑이 덤을 남기기가 어려운 국면이었다. 김재석이 자신의 비세를 직감하고 날카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명운이 반상을 내려다보며 김재석의 수를 헤아려 본다.

‘다른 건 몰라도 형세 판단만큼은 일본에서 제대로 배웠군. 하지만 자네는 아직 멀었어.’

명운은 침착한 수읽기로 냉정하게 응수했다.

승부수가 무위로 돌아간 김재석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밤늦게 바둑은 봉수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바둑이 재개되었다.

밤새 같이 온 일행과 더불어 연구를 한 듯 김재석의 마지막 승부수가 다시 반상에 작렬했다.

이번엔 명운의 장고가 계속됐다. 장고 끝에 명운은 한 차례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김재석이 명운의 실수를 재빨리 낚아챘다. 하지만 명운의 수습이 워낙 탁월한 바 있어 김재석의 추격은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됐고 승부는 여전히 백 우세였다. 김재석의 거센 추격을 따돌린 바둑은 반면으로 비슷했다.

그 상황에서 계가로 갔으면 반면 빅 정도로 4호 반의 차이가 날 바둑이었다. 더 이상 승부처가 없는 상황에서 김재석은 끝까지 계가로 가지 않고 돌을 던졌다. 설숙도장으로서는 귀중한 1승을 올린 것이었다.

기보를 접한 설숙은 흡족해했다. 비록 종반에 한 수 실수가 있긴 했으나 그 뒷수습이 돋보이는 한 판이었다.

설숙도장에서는 경사가 났다. 하루 반나절 걸린 장거리 대국이었기에 설사 하루를 더 쉰다고는 하나 피로가 누적될까 싶어 김원준이 명운의 어깨를 주무르며 기세를 돋우었다.

장승표와 박갑수는 마치 그 승부로 인해 모든 것이 끝이 난 듯 읍내에서 몰래 가져온 농주(農酒)를 앞에 놓고 연신 건배를 해 가며 술잔을 돌렸다.

「명운이가 많이 늘었어.」

박갑수는 어느 틈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동문들이 기쁨에 젖어 흥겨워하고 있을 때 동삼은 겨울나기에 부족한 땔감을 구하러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동삼의 온 신경은 온통 도장에 쏠려 있었다.

겨우 나무 한 짐 하는 데 한나절 넘게 소비한 동삼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승부가 끝나 있었다. 김재석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자기들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고 박갑수와 장승표는 술이 취해 해롱거리며 명운을 둘러싸고 환호작약하는 중이었다.

물어 보지 않아도 승부의 결과는 번연히 알 수 있었다. 평소의 감정이 어떻든간에 동삼은 명운이 자랑스러웠다.

‘나도 한번 그들과 승부를 결해 보고 싶다.’

동삼의 승부혼이 그렇게 절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동삼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설숙 스승은 동삼을 본체만체했고 그렇다고 동삼이 자신의 의지를 스승에게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삼은 끓어오르는 투혼을 삭이며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노련한 부목답게 장작은 단 한 번의 도끼질에 의해 정확하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동삼은 가슴이 후련해질 때까지 계속 장작을 팼다.

일본의 두 번째 주자는 시마즈 5단이었다.

돌을 가린 결과 다행히도 정명운 흑, 시마즈 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