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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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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상 위에 석 점 치석을 놓는 그의 손길이 가볍다. 그렇다고 해서 장고파인 그의 습관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거의 속기로 일관하는 평사가 두 칸 높은 협공을 하자마자 소장은 어김없이 턱을 괴고 깊은 장고에 빠져 든다.
평사는 습관처럼 강가에 앉는다. 기약 없는 무심한 세월은 줄기차게 흐르고 반상 위에는 끝없는 인내만이 있을 뿐이다. 강가에 밤이 지나고 새벽 안개가 몰려온다. 강 건너편에서 밀려드는 안개는 아득하고 또 막막하다. 강가에는 새벽 안개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말없이 평사를 몰아간다.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과정도 없고 결론도 없는 바둑을 두라고 자꾸만 평사를 몰아간다.
소장의 야무진 손끝이 반상을 힘차게 두드린다. 타성에 젖은 평사가 뒤이어 착수를 한다. 뻔한 수인데도 소장은 또다시 장고에 들어간다. 평사는 물결에 흔들리는 낚싯줄을 바라본다. 반상 위엔 아무 것도 없다. 수도 없고 희망도 없고 승부도 없고 마침내는 바둑도 없다. 소장실 문이 덜컥 열렸다. 근래 없이 드문 일이다. 한 사내가 들어서자 소장이 반색을 했다.
「어쩐 일이오. 어젯밤 얘기론 기타 큐슈로 간다더니만?」
한 쉰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소장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으로 보아 소장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람 같았다.
「저쪽 일이 틀어져 버렸소. 잘됐지 뭐. 오랜만에 만나 헤어지기가 아쉬웠는데…….」
사내의 시선이 바둑판에 잠깐 머물렀다. 반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이채롭다.
「흑이 좀 답답한걸. 보아하니 접바둑 같은데 두 점? 아니면 석 점? 이거 뜻밖인걸. 이런 곳에 이만한 고수가 다 있다니…….」
소장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석 점이오. 조선인 징용자 중에 바둑 고수가 있어서.」
조선인 징용자라는 말에 사내의 얼굴엔 실망의 기색이 완연했다.
「조센징이라……. 이봐, 얼굴 한번 들어 봐! 무슨 죄를 졌나? 얼굴은 왜 그렇게…….」
묵묵히 바둑판만 응시하고 있던 평사가 고개를 들자 갑자기 사내의 말이 뚝 끊어졌다. 평사를 보고 양미간을 좁히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사내가 별안간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 양반이 누구야! 당신이 어떻게 여길!」
평사가 사내를 보았다. 사내의 긴 인중(人中), 좁게 빠진 하관(下챷). 비록 세월이 지나 옛날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반백이 되어 버렸지만 평사는 사내를 알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이!」
갑작스런 충격으로 사내는 거듭 그 말만 되풀이했다.
「아는 사람이오?」
잔뜩 궁금해진 소장이 사내에게 물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사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장에게 되물었다.
「엉? 뭐라 했소?」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소. 엔도(遠藤)상!」
사내가 엉거주춤하자 더욱 궁금해진 소장이 짜증을 낸다. 짜증 섞인 소장의 말에 엔도라는 사내의 얼굴이 겨우 제자리를 찾는다.
「알지…… 잘 알지……추평사…… 조선 제일의 국수…… 당신이…… 당신이…….」
엔도는 평사를 지칭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잔뜩 긴장된 엔도의 행동에 심사가 뒤틀린 소장이 판을 쓸어 담으며 다소 냉랭한 음성으로 엔도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지금은 조선인 징용자요.」
징용자라는 소장의 말에 엔도는 비로소 두서 없이 내몰린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날 기억하겠나?」
「…….」
「동경의 한 여관이었지. 그때 당신 옆엔 마쓰모토상이 있었고, 우리측 선수는 미라부였어. 두 점 접바둑이었는데…… 미라부에겐 두 명의 전주가 붙었고 그 중 한 명이 나였어. 지금에야 별 볼일 없지만 당시 마쓰모토상은 상대가 누구든, 돈이 얼마가 걸리든 항상 여유만만했지. 당신이 있었으니까. 그날도 마쓰모토상의 얼굴엔, 두 점의 불리한 치석인데도 불구하고 여유가 넘쳤어. 오히려 우리 쪽에서 혹시 지면 어떡하나 하고 불안에 떨었지……. 붙어 볼 만은 한데 확신은 할 수 없고…… 결국 미라부는 두 점으로도 당신의 벽을 못 넘고……. 그때 참관인은 일본기원의 게이오 4단이었지 아마…….」
어찌 그걸 잊을 수 있겠는가. 300원짜리…… 당시로선 꽤 큰 판이었다. 두 점으로는 불패의 명인 슈사이 본인방도 자신 있다고 큰소리 친 미라부였다. 종반에 가서 두세 집 차이가 확실해지자 미라부가 무리한 승부수를 던져 자멸했다.
평사는 무의식중에 갑자기 바둑판 위에다 한 수 한 수씩 착수하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과거의 기억은 그때 그 자리, 그때 그 판으로 평사를 몰아갔고, 평사는 마치 방금 바둑이 끝난 그 자리에서 복기를 하듯 미라부와의 한 판을 7년이란 긴 세월을 건너뛰어 생생하게 반상 위에 재현한다.
머쓱해서 뒤로 물러앉은 엔도의 눈동자가 점점 커진다. 엔도가 숨을 죽인 채 평사가 그리는 한 폭의 그림을 주시했다. 영문을 모르는 소장조차 기이한 열정에 감응되어 긴장된 표정으로 바둑판을 응시했다. 바둑판에 돌이 촘촘히 들어 차 있을 즈음 평사의 손에서 떨어진 백의 한 수를 보고 엔도가 돌연 소리를 쳤다.
「맞아! 그 한 수였어! 그 수 때문에 혼미하던 바둑의 균형이 일시에 무너져 버렸지. 당신의 결정적인 한 수였어.」
목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소장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7년 전 그 바둑이란 말인가! 이거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비로소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한 소장이 입을 딱 벌렸다. 평사는 하던 복기를 멈추고 주섬주섬 돌을 챙겨 통 속에 집어 넣었다.
「대단하군.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나? 당신한텐 꼭 기억해야 할 만큼 중요한 판도 아니었을 터인데……. 그나저나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나?」
평사의 가공할 기억력에 탄복한 나머지 앞뒤 생각 없이 불쑥 엔도가 물었다. 그때 흥분을 가라앉힌 소장이 평사에게 명령했다.
「그만 됐어. 나가 봐.」
평사가 나가자 소장실에는 한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한참 후 엔도가 조심스럽게 소장에게 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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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돌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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