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시가 가까워지자 하루 종일 얼씬하지도 않던 현장 감독이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군용 도라꾸를 끌고 나타났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각 조장들에게 인원 점검을 지시한 후 그날의 작업 현장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모두 초조하게 현장 감독의 행동을 주시했다.

만약 그의 입에서 불합격 판정이 내려지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시 재작업을 해야만 했다.

철도 공사에만 20년을 종사했다는 감독의 눈은 날카로웠고, 대충 망치로 몇 군데만 두드려 보아도 잘못된 곳을 단번에 지적할 정도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다행히도 그날의 작업은 합격 판정을 받았다. 사람들은 한시름 놓으며 줄줄이 지친 몸을 끌고 숙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 손씨가 말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언젠가는 조장과 양가 그놈들이 앞잡이란 게 백일하에 드러날 거야.」

「드러난들 어쩌겠소?」

묵묵히 듣고만 있던 평사가 손씨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하긴. 그들이 저지른 피값을 받아 내야지.」

「…….」

「증거만 잡히면 앞잡이가 누구든간에 내 그놈의 배를 갈라서 새끼줄을 뽑아 버리고 말 거야. 두고 봐.」

숙사 앞에 당도한 평사는 한 길 반은 족히 되는 높은 담장과 그 위에 둘러쳐진 철조망을 올려다본다. 멀리 망루 위에 희끄므레하게 보이는 보초와 훤하게 불을 밝힌 탐조등(探照燈:서치라이트)의 뿌우연 궤적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밝다고 평사는 생각한다.

탈출은 어렵다. 성공의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완벽한 확신 없이 탈출을 도모하는 것은 어리석다. 잡히는 그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다. 나는 절대 죽음을 걸고 도박을 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기회, 언제 올지 모르지만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설령 그럴 확률이 희박하더라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짧지 않은 생애 동안 승부로 점철된, 승부에서 다져진 감각이 그렇게 평사에게 속삭인다.

기다려야 한다. 끝까지 끝까지…….

호리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호리에 관장의 얼굴이 불쑥 떠오른다. 평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처음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날, 자신을 체포한 오타루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한 뒤 깨어나 정신을 차린 곳은 어두컴컴한 경찰서 유치장이었다.

취조를 당하면서 평사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서류상의 착각이 아닌 누군가의 조작된 음해로 인해 헤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조서에 박힌 자신의 이름도 틀림없었고 불령선인이란 사실도 확실했다. 막다른 덫에 걸린 평사는 침묵으로 형사의 취조에 응했고 형식적인 심문을 마친 직후 북해도에서 제일 가까운 벌목장으로 넘겨졌다.

호리에…… 그 외에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바둑으로 돈을 잃은 피해자나 혹은 자신이 제거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애써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합당한 인물이 선뜻 잡히지 않았다.

평사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줄 사람으로 산쓰이도장의 호리에 관장을 거론했을 때 형사의 얼굴에 비웃는 듯 떠오른 차디찬 미소, 처음에는 그것이 조선인에 대한 냉소적 반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평사의 착각이었다. 그 냉소의 뒤편에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 그것은 호리에였다.

전면에서는 산쓰이의 백 수십 년에 걸친 한, 새로운 신분 운운하며 회유하였고, 배후에서는 만약 평사가 자신의 제의를 거부했을 때를 대비해 호리에는 거세의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평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둑에 미친 한 노인네의 제안을 거부한 대가치고는 자신이 겪어 왔고 또 언제까지 겪어야 할지 모를 고통의 나날들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선로 가설 지점에 나타난 암반 때문에 발파 작업이 시작되었다. 암반에 구멍을 뚫고 다이나마이트를 심어 폭파할 때는 사람들은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피신을 해야 했다. 징용자들 입장에서 보면 흔치 않은 행운이다.

「조장과 양가 놈은 한 패였네.」

발파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전지대에서 손씨는 평사에게 속삭였다.

「어젯밤 자다 말고 소피가 마려워 숙사 밖으로 나갔네. 숙사를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 왔어. 알다시피 전부 지쳐 곯아떨어진 마당에, 그 밤늦은 시간에…….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몸을 뒤로 숨겼지. 초소 옆에서 몇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 거리가 멀어 이야기의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한 놈은 왜놈 작업반장이었고 그 앞에 몸을 숙이고 있는 다른 두 놈은 우리와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네. 내가 다시 숙사로 돌아온 한참 뒤, 두 놈이 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와 자기 자리로 가는데…… 바로 조장과 양가 놈이었어.」

「…….」

「틀림없어. 오늘도 봐. 조장이 제일 쉬운 허드렛일은 꼭 양가 놈에게만 맡기잖아.」

「…….」

「두 놈이 똑같이 왜놈 앞잡이였어.」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소.」

평사의 한마디에 의기양양해하던 손씨의 얼굴이 침울하게 굳는다. 실상 그 점은 손씨 자신도 염려하는 바였다. 막상 그들을 없애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용케 앞잡이를 색출해 처단한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그들은 다시 누군가 앞잡이를 만들어 어떤 형태로든지 징용자들의 동향을 파악하려 들 테니까.

손씨는 평사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아스라히 산구비를 돌아가는 철도로 시선을 돌린다.

인간의 힘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산을 깎고, 축대를 쌓고, 굴을 파서 철도를 놓는 작업이 불가능해 보이던 이곳도 더디긴 하지만 날로 진척을 보여 어느새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며 계곡 전체가 커다란 진동을 일으킨다. 꽤 멀리 떨어진 자리인데도 주먹만한 돌들이 날아온다. 발파 작업 현장에선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 오른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 온다.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손씨가 평사를 보며 계면쩍게 씩 웃는다. 절망이 더께더께 붙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