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을 포함한 전체 일본 열도에서 그런 징용지는 수십 군데를 헤아렸다.

대열이 서서히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죽음이 난무하는 처절한 곳을 처참한 형상을 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렬 종대로 무거운 발길을 옮기고 있다. 탈출은 탈출이고 작업은 작업인 것이다. 이곳은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큐슈 중앙 아소산(阿蘇山) 일대 산악지대 철도 건설 징용지이다.

앞에서 걷고 있던 손씨의 발걸음이 휘청한다. 그로 인해 평사와 손씨의 어깨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침목(枕木)이 일순 균형을 잃고 기울어진다. 평사는 이를 악물고 어깨와 다리에 더욱 힘을 주며 기울어지는 쪽으로 급히 상체를 따라 움직였다.

평사가 시의적절하게 대응한 탓으로 손씨는 곧바로 중심을 잡았다. 뜻하지 않게 길 앞쪽에 웅덩이가 패여 있었다.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배식 시간이다. 군용트럭에 싣고 온 밥을 배식병이 차례차례 징용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밥이라야 옥수수, 조, 보리를 섞어 찐 쉰내 나는 주먹밥과 풀떼기국이 전부였다. 항상 허기진 배로 중노동에 시달리는 징용자들, 그들은 쉰내 나는 주먹밥일망정 조금이라도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배식병 앞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눈치를 슬슬 본다.

「다음.」

평사의 식기에 주먹밥과 국을 퍼 넣어 준 배식병이 식기 바닥을 탕탕 두들긴다.

평사는 축축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온통 먼지와 흙투성이인 더러운 손으로 평사는 그냥 주먹밥을 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 안에서 역한 냄새가 확 배어 나온다.

「양가 놈 배식받는다. 잘 봐.」

손씨는 양이 배식받을 때마다 평사에게 주의를 환기시킨다.

굳이 손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분명 양의 배식에는 수상쩍은 점이 몇 가지 눈에 띈다. 양은 배식을 받을 때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지만 동일한 방식의 행동을 반복한다. 오른손에 든 식기를 왼손으로 바꿔 들고 오른손으로 식기 옆면을 두어 번 두드린다. 그때마다 기계적으로 주먹밥을 식기에 던져 넣던 배식병이 흘깃 양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짐짓 무심한 동작으로 주먹밥을 집어 올려 양에게 배급한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행동이지만 결과는 항상 같다. 양의 주먹밥은 다른 사람 것과 비교해 배나 가까운 크기였다.

국을 퍼주는 배식병의 행동은 더욱 수상하다. 국자를 깊숙이 국 속으로 찔러 넣어 걷어 올린다. 아무리 멀건 풀떼기국이라도 약간의 건더기는 있게 마련, 어김없이 양의 식기에는 제법 알찬 건더기가 섞인 국이 건네진다.

「저 봐. 또 저렇게 큰 거야.」

지겨우리만큼 손씨는 매번 같은 소리를 반복한다. 똑같은 소리지만 손씨의 말투엔 처음 양을 의심했을 때와는 달리 질투와 부러움까지 섞여 있다.

근래 들어 손씨는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졌고 작업 도중 실수가 잦았다.

평사는 손씨를 이해했다. 지옥 같은 이곳에서는 무엇보다 잘 먹는 게 급선무였고, 살아 남기 위해서라면 일본인 앞잡이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심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중장비의 도움 없이 순수한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철도 건설공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중노동이었고 징용자들의 피와 땀을 요구했다.

큐슈 중앙의 산악지대를 가로지르는 지금의 철도 공사는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다.

그런 험한 공사를 하면서도 배급되는 식사는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양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작업은 밤 열 시를 넘기기가 예사였으며 하루에 계획된 작업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일을 계속했다.

휴식조차 없는 혹독한 노동과 영양 실조로 인해 헤아릴 수조차 없는 징용자들이 시체로 변해 어디론가 실려 나갔고 쉴 사이 없이 새로운 인원이 보충되었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언제 자신 또한 차디찬 시신으로 산 속 어딘가에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될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누구도 하루에 열다섯 시간을 넘는 중노동에 이의를 달지 못했고, 언제 어떻게 시체가 될지 모르는 공사 현장에서 그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매일매일 절망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놈이 수상해.」

손씨가 밥을 먹다 말고 양을 힐끗 본다.

「틀림없이 놈이 앞잡이야.」

손씨는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알뜰하게 비운다. 식사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다시 들린다. 손씨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린다.

「그나저나 아까 탈출한 사람들은 어찌 됐을꼬…….」

털어 봐야 곧 더러워질 엉덩이를 손씨가 무심하게 툭툭 턴다.

다이헤이산(太平山) 줄기 벌목장에서 2년,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리 광산에서 다시 1년을 보낸 평사가 이곳 큐슈로 온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손씨는 평사가 한 해 동안에 걸친 이곳 징용지에서 유일하게 사귄 사람이었다.

경기도 양주(楊州)가 고향인 손씨는 합방 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부둣가로, 탄광촌으로 손씨는 돈을 벌기 위해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돈벌이는 신통찮았고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 생각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태반이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노무자를 모집하는 일본 민간기업체에 스스로 자원을 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온 손씨는 소문과는 판이한 처참한 징용지에서 여러 공사 현장을 끌려 다니다가 결국 여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됐다.

징용지에는 어딜 가나 일본인 앞잡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일본 군인들에게 징용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샅샅이 고해 바쳤다. 그로 인해 징용인들 사이에는 불신이 횡행하였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심리가 팽배했다.

함경도 원산(元山)에서 징용된 스무 살 안팎의 한 청년이 젊은 혈기로 불평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하루의 일하는 노동량을 줄여 주든지 식사라도 제대로 배급해 주든지, 이러다가 징용자 전원이 숙사 뒤쪽 야산에 시체가 되어 쓰레기처럼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부추겼다.

청년은 징용지에 끌려온 지 아직 한 달도 채 안 되는 신출내기였다.

다음날 새벽 기상시간이 되기도 전에 느닷없이 두 명의 일본 군인이 숙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청년을 끌어내린 후 총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침묵 속에 자행되는 폭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공포였다.

청년의 몸은 순식간에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렸고, 피투성이가 된 눈, 코, 입엔 핏물이 낭자했다. 청년이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리자 그들은 성기를 꺼내 청년의 얼굴에 오줌을 갈기고 난 후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날 밤, 야간 작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청년은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어디서 날아 들었는지 피투성이가 된 채 일그러진 청년의 얼굴 위로 쉬파리가 붕붕거리며 들끓었다.

징용자들은 누구 하나 시신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때 손씨가 손으로 파리떼를 쫓아 내며 청년을 끌어안았다.

「차라리 죽는 게 편할 거다……. 잘 가라……. 그리고 다시는 조선인으로 태어나지 말거라……. 다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