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붉게 타오른다. 밤새 바람에 시달리며 어둠으로 물들어 있던 창틀엔 어느 틈엔가 새벽이 서성대고 있었다. 긴 이야기에 지쳤을 법도 하건만 해봉처사의 몸에서는 피로한 기색 대신 미묘하게도 선(禪)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닫이 문을 열자 새벽 찬 기운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간밤 내내 태백의 준령을 울게 했던 바람도 잦아 있었다. 저 멀리 산마루에 걸려 있던 청명하고 붉은 해가 빠른 속도로 부상하며 온 산을 주황색으로 채색해 놓았다.

박 화백은 어쩐지 여명의 하늘이 붉다기보다는 핏빛으로 번져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추동삼씨의 어머니가 되시는 화정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기품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한마디로 가인(佳人)이었지.」

해봉처사는 산자락을 돌아 드는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본다.

「사람의 운명이란 비정하네. 그 누구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해…….」

해봉처사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따지고 보면 추평사 선생의 운명이야말로 보기 드물게 기구하달밖에. 아니 추씨 일가의 운명이 기구했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대열 후미가 소란스러워졌다.

호르라기 소리가 다급하게 울리며 군홧발소리와 연이어 계곡을 진동시키는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 왔다.

「빠카야로. 이 조센징 새끼들, 빨리 한 줄로 서!」

대열을 인솔하던 군인이 거친 욕설을 뱉어 내며 권총을 꺼내 흔들었다. 그의 거친 욕설과 명령이 없어도 사람들은 조금 전의 그 소요가 또 한 차례 일어난 탈출극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도로 한켠에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자 인솔 장교가 각 조의 조장들에게 인원 점검을 지시했다.

인원 점검을 하는 사이 인솔 장교는 급한 대로 무전기를 두드렸고 곧바로 1개 분대쯤 되는 인원이 다급하게 군견을 끌고 탈출한 사람들의 도주로를 뒤쫓기 시작했다.

1차로 1개 분대 인원이 내려간 지 2분도 안 돼 두 대의 군용 도라꾸(트럭)가 도착하더니 소대 이상의 병력을 하차시켰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 아래에도 비슷한 수의 병력이 서로간에 긴밀한 연락을 하며 탈출자들의 도주로를 부산스레 차단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 차례 강풍이 몰아치자 나뭇가지 위에서 우수수 낙엽이 주위에 떨어졌다.

‘날은 잘 잡았구나.’

평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산림은 제법 울창한 편이었고 마침 낙엽이 지천으로 깔리던 때라, 군용견만 아니면 어지간한 병력을 풀어 놓아도 그들을 수색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낙엽은 한밤 추위를 막아 주는 데도 단단히 한몫을 할 수 있을 뿐더러 위장을 하거나 은신하기에도 적합했다.

그러나 왠지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과 물이 충분히 확보되었느냐 하는 것인데, 이 척박한 징용지에서 식량을 제대로 확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득불 도주 중간에 먹을 것을 확보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게 만만치가 않았다.

여름이라면 나무 열매라도 간간이 있으련만 계절이 계절인 만큼 최소한의 식량 확보도 지난(至難)한 과제였다.

「이 개 같은 새끼들! 조장이란 놈들이 이렇게밖에 못해!」

인원 점검이 끝나고 탈출자의 신원이 드러나자 인솔 장교가 도망 간 조의 조장들을 마구 후려 팬다.

평사가 속한 6조는 무사했지만 9조에서 세 명, 10조에서 한 명의 탈주자 신원이 확인되었다.

징용지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곳이었다.

하루에도 통상 몇 명씩 심하게는 10여 명씩 과로와 영양 실조로 죽어 나가지만 그것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징용지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었고, 거의 매일 되풀이되는 일이었기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탈출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문책이 뒤따랐다. 아마도 탈출한 사람에 의해 징용지의 실상이 밝혀질까 우려하는 조치일 것이다.

하지만 쉬쉬 한다고 징용지의 실상이 묻힐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흘러 드는 말을 종합해 보면 그나마 이곳 큐슈 지방은 나은 축에 속했다.

평사가 처음 끌려간 혼슈 최북단 벌목장만 하더라도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배급되는 밥은 이곳이나 그곳이나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곳의 가혹한 자연 조건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혹독했다.

입김마저 얼어붙는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서, 배급된 누비 솜옷 두 장에 의지해 그들은 작업장으로 짐승처럼 내몰렸다. 동상으로 발목까지 썩어 나가는 일은 예사였고 얼어서 둔해진 몸으로 잠깐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거대한 나무 둥치에 깔려 죽기 십상이었다.

북해도의 철도 징역지나 사할린의 탄광 지대는 더욱 악명이 높았다.

수많은 사람이 침목이나 레일에 깔려 죽어 나갔고 막장 안에서 피 섞인 검은 가래를 토하며 쓰러졌다.

‘어머니, 집에 가고 싶어요.’

사할린에서 한 청년은 갱도 벽에 연장으로 그렇게 글씨를 새겨 넣고 사흘 만에 무너진 막장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언제부턴가 조선인 징용자들 사이엔 ‘아리랑’이 마지막 희망의 상징으로 널리 불리어졌다.

단성사에서 개봉이 되어 전대미문의 관객 동원 기록을 남긴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圭)의 「아리랑」. 그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된 ‘아리랑’이 이제 전 조선인들에게 열병처럼 번져 민족의 노래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고, 이국의 하늘 아래서 죽어 가는 징용인들은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아리랑’을 불렀다.

이곳 큐슈 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용식(張用識). 언제나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하던 과묵한 사내. 누구와도 가깝게 지낸 적이 없고, 남에게 말 한마디 거는 법이 없던 외톨이 장용식.

그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평사는 그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석 달 전. 갑작스런 폭우로 도저히 작업을 지속할 수 없었던 그날. 서둘러 숙사로 돌아오던 길에 장용식은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폭우 속이라지만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그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었다.

장용식의 탈출이 발각된 건 숙사에 도착한 직후 인원 점검에서였다. 그 즉시 비상이 걸렸고 폭우 속에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벌어졌다. 그는 1주일 만에 잡혀서 돌아왔다. 열병과 탈진으로 그는 거의 죽은 상태였다. 그와 탈출을 모의한 사람과 도주로를 캐내려는 상부의 은밀한 지시에 의해 그는 이례적으로 의무실에 입실을 했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운이 좋았으면 그가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 징용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입실 사흘 만에 의식을 회복한 장용식에게 일본군들의 잔인한 고문은 시작됐고, 그는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불지 않았다. 초죽음이 된 장용식은 징용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연병장으로 끌려 나갔다. 장용식은 마지막 힘을 다해 ‘아리랑’을 불렀다.

그때 몇 발의 총성이 울렸고 장용식은 연병장 한가운데 무릎을 꺾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