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간 고지대의 눈은 아직도 두텁게 쌓여 있었고 가끔씩 폭설이 내리기는 했지만 어느 틈엔지 봄기운이 감돌았다.

평사는 창 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산을 건너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전 어렵게 자신을 수소문해서 찾아온 정 역관을 통해 화정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네가 떠난 후 화정이는 애를 낳았네. 여자 혼자 몸으로 애를 낳아 키우면서 다니던 권번도 그만두었다네. 자네가 적지 않은 돈을 보내 주어 생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허전해 보이더군. 두 사람 다 정말 모를 사람들이야. 화정이는 화정이대로 일체 아이 소식도 전하지 않은 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자네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고, 자네는 돌아갈 기약도 없이 이 북해도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애 이름은 동삼(東三)이라고 지었다더군. 사내아일세.」

화정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평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사가 그렇게 갈등에 빠져 있는 그 시각 호리에 관장과 준코는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확실하냐?」

「……예.」

「얼마나 되었느냐?」

「3개월…….」

「알았다. 그 사람에게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다오.」

준코가 나가려 하자 호리에 관장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직, 내가 말해도 좋다고 허락할 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잠시 후 준코로부터 전갈을 받은 평사가 나타났다.

「이제 봄이 오고 일본기원에 알아보았더니 곧 입단 심사가 있을 예정이라고 하더군.」

준코를 가까이한 이후로 호리에 관장은 평사에게 하대를 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네. 이제 대답을 해주게.」

평사는 잠자코 있다.

「산쓰이도장 출신으로 일본기원에 입단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나?」

평사는 조선으로 돌아가리라 마음 먹는다.

「내가 전에 세키야마 센다이우(關山仙太夫) 얘기를 한 적이 있었네. 내가 왜 그 사람 얘기를 자네에게 들려 주었는지 아는가? 자네와 같은 기재가 세키야마의 전철을 밟게 될까 싶어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야. 그렇게 되면 바둑계 전체로 봐도 불행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자네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네. 자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쩌면 자네는 그 빛나는 기재를 가지고도 평생을 야인으로만 떠돌게 될 것이네.」

호리에는 거듭 평사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그가 언급한 세키야마 센다이우는 막부시대 이래로 바둑사에 남을 최강의 비전문기사였다.

원래 세키야마는 신주(信州)의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자신도 엄연한 사무라이였다. 바둑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던 세키야마는 틈이 나는 대로 바둑 수업에 몰두하여 열여섯 살의 나이에 초단을 땄다.

그러나 바둑 수업 때문에 문무의 수업을 게을리한다는 것은 사무라이의 본분에 어긋난다는 주위의 비난 때문에 바둑 수업을 중단하고 7년간 무술에 전념하였고 그 후 다시 바둑의 길로 들어서서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잠재웠다.

그는 3묘수로 유명한 죠와 명인에게 두 점으로 한 집을 이기고 5단 면허를 신청했다. 당시의 명인에게 두 점이면 당연히 5단격이었다. 그러나 고집 세기로 유명했던 죠와는 예의 고집을 부려 즉각적인 5단 면허는 전례가 없다 하여 3단을 수여하겠다고 세키야마에게 제의했는데 세키야마는 단호히 그 제의를 거부하고 평생을 비전문기사로 보냈다.

그는 후성(後聖)으로 일컬어지는 슈사쿠의 전성기 때에 선으로 그와 20국을 두어 7번이나 이겼으니 대단한 기재였다.

「당시에 죠와 명인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5단 면허를 부여하여 세키야마에게 전문기사의 길을 열어 주었다면 일본 바둑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아무도 모르네. 그는 그만큼 걸출한 기재였고 전문기사 집단에 속해 좀더 좋은 여건에서 바둑 수업을 했더라면 그의 성취가 어디까지 도달했을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네. 그런 기재가 죠와 명인의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초야로 돌아간 것이네.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자네도 괜한 고집을 부려 자네 인생을 망치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조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설득 속에서 평사가 내린 답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호리에 관장과 준코를 생각하면 쉽게 간다고 말을 꺼낼 수는 없었으나 어차피 떠나야 했기에 평사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평사는 곧바로 호리에 관장에게 절을 하고 물러 나왔다.

평사를 통해서 산쓰이의 100년 한을 풀고자 했던 호리에 관장은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자 일순간에 그 염원이 뒤바뀌어 증오의 불길로 타올랐다.

「고약한 조센징!」

씹어 뱉는 듯한 조센징이란 한마디가 호리에 관장의 얇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호리에 관장의 안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친 김에 다음날 평사는 산쓰이도장을 떠났다.

오타루 역사에서 기차를 타고 하코다데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부두에서 아오모리행 표를 끊어 아오모리로 가서 그곳에서 시모노세키로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돌아가리라.

화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

조선을 떠난 지 3년. 돌이켜보면 평생 처음으로 가슴에 두었던 사람이었다. 화정을 생각하는 평사의 가슴이 설레인다. 그때 그의 곁으로 낯선 두 사내가 다가왔다. 한 사내가 품속에서 서류뭉치를 꺼내더니 평사에게 물었다.

「추평사. 조선인. 경북 봉화 출신 맞나?」

평사가 흐릿한 눈길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소.」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감돌았다. 그는 품속으로 서류뭉치를 다시 쑤셔 넣었다.

「큐슈 사세보 철도건설 현장에서 징용인으로 부역하던 중 탈주, 6개월 동안이나 수배 선상에 올라 있었는데 용케도 남쪽 끝에서 이 북쪽 끝까지 와서 숨어 있었군. 너를 체포한다.」

한 사내가 잽싸게 평사의 허리춤을 잡았다. 동시에 방금 서류뭉치를 꺼냈던 사내가 평사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무슨 소리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평사가 거칠게 항의했다. 그때 수갑을 채운 사내의 주먹이 평사의 안면에 작열했다. 강철 같은 주먹이었다. 대번에 입안이 터져 입가로 피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이어 사내의 주먹이 평사의 복부를 파고들더니 목덜미에 쇠뭉치 같은 강한 충격이 떨어졌다.

창자가 끊기는 듯한 심한 고통을 느끼며 평사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화정…….

아득히 정신을 잃어 가는 평사의 뇌리에 화정의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