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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4부 나타난 승부사 (4)

2007-03 조회 3600추천 0 프린트｜스크랩

송 영감도 한땐 내기바둑꾼이었다. 젊은 시절 꽤 알아주는 바둑이었으나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는 신진 승부사들에게 밀려 어느 틈엔가 뒷방 신세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승부사로서의 길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변신을 했다. 그는 타고난 사교성과 구수한 입심으로 그 세계에서 동료들간에 인기가 좋았다. 그는 그것을 무기로 전주와 승부사들을 찾아다니며 중간 다리를 놓는 역할을 주로 했다. 말하자면 승부를 성사시키는 매치메이커였다. 자연 전주들과 승부사들의 중간 위치에서 치수 조정은 그의 몫이었고 승부가 끝나면 이기는 전주에게 푼돈도 얻어 쓰고 술 대접도 받는 위치가 됐다. 전주로 나섰다가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허당이 된 신 영감과는 그때 친분을 맺었다. 그는 흰 양복에 백구두를 즐겨 신는 멋쟁이였다. 돈이 생기면 반도 호텔에 자주 투숙했다 하여 반도 송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승부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를 바둑호사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그도 그 세계를 떠나게 됐고 그러다가 말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소일거리로 세상을 보내고 있었다. 「맞아…… 이름이 추동삼이었어.」 송 영감은 말을 더듬거리며 옛날을 회상한다. 복덕방 근처 술집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이미 소주를 여러 잔 비운 상태였다. 박 화백은 송 영감을 통해 비로소 추 사범과 추동삼이 동일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포하고 둔 바둑이 아마 마지막이었을 거야…….」「맞아, 맞아! 양포하고 붙었지. 겁나는 판이었어.」 송 영감의 말에 신 영감이 맞장구를 친다. 「양포가 누굽니까?」 박 화백이 송 영감을 향해 물었다. 송 영감은 추동삼과 양포에 얽힌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늘어놓았다. 「이양포(李楊抱)는 당시 최고의 내기바둑꾼이었소. 전문기사들도 사석에서 양포에게 추풍낙엽처럼 날아갔지. 양포는 돈 100만 원만 걸리면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었소. 프로 정상급 기사와의 대국도 자신 있다고 큰소리 쳤으니까. 사실 그 말도 일리는 있었지. 누구도 호선(맞바둑)으로는 양포를 이길 수 없었어. 양포는 타고난 내기바둑꾼이었소. 그 당시 내기바둑의 산실이던 청량리와 영등포, 종로 일대의 강자들은 모조리 양포 앞에 무릎을 꿇었고 시골에서 올라오는 내로라 하는 지방의 국수급들이 양포에겐 선(先: 흑을 쥐고 덤 없이 먼저 두는 바둑)에도 못 버텼소.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소. 그래서 양포는 선으로, 선에 덤 다섯 집(선에 오목과 동일), 두 점, 이런 식으로 상대를 접고 내기바둑을 두었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기바둑 세계라는 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동네요.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는 아싸리 판이지.」「당장 거액의 돈이 왔다갔다 하니까 전주는 막후에서 피 튀기는 치수 싸움을 벌이고……. 선수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두었소.」「하기야 자꾸 패하게 되면 전주가 떨어져 나가고, 전주가 떨어지면 선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떠돌이 독립군이 될 수밖에 없으니…….」 신 영감이 거든다. 「하여간 그렇게 선으로, 두 점으로 접고도 양포의 승률이 80프로를 넘었으니 양포가 대단한 바둑인 건 틀림없었소. 그의 말마따나 정말 정상급 프로 기사들에게도 지지 않았을지 모르지.」「양포에게 전문기사들도 많이 당했어.」 신 영감이 아는 척을 한다. 「하긴 그때만 해도 전문기사치고 내기바둑 안 두는 사람이 없었어. 전문기사 생활이 워낙 빈한했기에 기사직을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고…….」「자네도 양포에게 한 번 당했지?」 신 영감이 송 영감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두 점이면 이길 줄 알고 붙었다가…… 초반엔 판이 좋았는데…….」「두 점 놓았으니 판이 좋을 수밖에.」「중반까지도 괜찮았어.」「그럼 막판에 뒤집어졌나?」「그렇게 봐야지. 사실 다 이겨 놓은 바둑인데,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신 영감이 크게 웃었다. 「반도 송. 자네 대마가 죽어서 던졌잖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네.」「대마가 죽어! 그럴 리가 있나! 우리끼리 하는 말로 애들 장난도 아니고…….」 송 영감은 능글맞게 패인을 은폐한다. 「추동삼씨는 언제 나타났습니까?」 박 화백은 추동삼에 대해 빨리 듣고 싶었다. 송 영감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추 사범은 신비한 사람이었소. 처음 이 바닥에 모습을 나타낸 게 이승만 시대 말기니까 50년대 후반쯤 될 거요.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소문 난 강자들을 상대로 폭풍처럼 몰아쳤소. 기억하기론 스무 판 남짓 두었는데…… 전승이었지.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양포와의 대국을 생각했소. 누가 이길지 말들이 많았지. 그 세계에선 선배였고 전적이 화려했었기에 전주들 사이에선 양포 쪽에 점수를 많이 주었소. 그런데 양포와의 대국이 거론될 시점을 전후해 추 사범이 사라진 것이오. 소문이 구구했소. 양포와의 대국이 겁나서 피했다고도 했고, 듣기로는 입단했다는 말도 있었소. 어쨌든 그렇게 사라진 추 사범이 1년 가까이 지나 다시 나타났소. 추 사범의 실력은 여전했소. 아무도 추 사범을 이겨 내지 못했기 때문에 추 사범도 양포처럼 선으로, 선에 덤, 오목 두 점으로, 이런 식으로 바둑을 두었지. 그런 식으로 내기를 두었지만 추 사범은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았소. 양포도 그런 식으로는 7, 80프로의 승률밖에 못 올렸는데 추 사범은 거의 지는 법이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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