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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4부 나타난 승부사 (1)

2007-03 조회 3712추천 0 프린트｜스크랩

「이 기원 생긴 지가 얼마나 됩니까?」「한 30년 되지요 아마. 전 주인으로부터 내가 인수한 것만 해도 10년이 넘었으니까…….」「여기에서 큰 내기바둑이 자주 열렸다지요?」 박 화백의 그 말에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왜, 큰 거 한번 하실려우?」「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저는 지금 누굴 찾고 있는데 어떤 분이 이 기원을 소개해 주며 한번 가 보라고 해서 왔습니다.」「누구를 찾는다고요?」「예.」「어떤 사람이오?」「모르긴 해도 옛날에는 바둑꾼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을 겁니다. 추동삼씨라고…….」「추동삼…… 잘 모르겠는데. 몇 살쯤 됐소?」「60이 넘었죠.」「그렇게 나이 든 노인네는 난 잘 몰라요. 내가 아는 바둑 두는 사람 중에 최고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해 봐야 내 나이 또래인데……. 저번 원장 양 노인 같으면 혹 알까 모르겠지만…….」「그렇다면 그 양 노인이란 분을 한번 만나 볼 수 없겠습니까?」「죽었소. 그 양반 숙환으로 3년 전에 떴소.」 원장은 그만 박 화백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기원 안에 붙어 있는 골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둑을 한판 둘까 하다가 박 화백은 그냥 일어섰다. 박 화백은 방금 원장이 들어간 방 쪽으로 다가갔다. 방문 틈 사이로 바둑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손이 반상 위에 착점을 하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골방 안에는 화투를 치는 사람들과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연신 빨아대고 있었다. 사내는 나이에 비해 이마의 주름이 굵게 그어져 있었다. 이 기원 저 기원 떠돌아다니며 속칭 ‘독립군’이라고 부르는 방 내기꾼 특유의 분위기가 사내에게서 진하게 풍겨 나왔다. 화투를 치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박 화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꺼멓게 죽어 가는 얼굴에 눈알만 반들거리는 사내가 경계의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 보자 박 화백은 황망히 발길을 돌렸다. 석파 선생이 일러 준 여러 기원을 찾아 다니던 박 화백은 점차 실망을 했다. 두 번째 기원부터는 원장의 보다 성의 있는 답변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바둑도 두고, 커피도 사면서 추동삼에 대해 물었지만 추동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박 화백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서두르지 말자, 여기서 못 찾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천천히 하나하나 매듭을 풀다 보면, 그러다 보면 실마리가 잡히리라. 박 화백은 추동삼을 찾기 위해선 인내가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기원을 돌아다닌 지 사흘째 되는 날, 답십리 고갯길에서 삼거리 쪽으로 50미터쯤에 위치하고 있는 답십리 제일기원으로 박 화백은 올라갔다. 그 기원도 다른 기원의 분위기와 흡사했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기원은 흡사 양아치 소굴을 연상케 했다. 박 화백이 들어섰지만 누구도 박 화백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박 화백은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단골 손님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죽치고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본방꾼이나 독립군으로서 기원의 터주대감들이었다. 그들 중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내가 옆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다른 사내를 슬슬 긁어 댄다. 「애 엄마는 돌아오셨는가?」 옆 자리 사내가 심드렁히 대꾸한다. 「자식 버리고 튄 년이 돌아오겠어!」「이제 오래 됐지라이.」「그럼, 오래 됐지…… 세월이 빠르더라고.」 사내는 남의 말하듯 한다. 「고생이 심하겠구마이라.」「고생은 무슨 고생, 다 사는 재미지.」 바둑에 정신이 팔린 사내는 나오는 대로 막 씨부린다. 「애들은 누가 키우는가?」「고아원에서 알아서 데려가데.」「고아원에서는 잘 노는가?」「잘 놀지, 집보다 나아, 친구도 많고.」「잘 됐구마이라.」 쌍방 겁나게 씨부린다. 모두가 오갈 데 없는 떠돌이들 같았다. 한결같이 허수룩한 복장에 찌들은 얼굴들이다. 개중에 피골이 상접한 한 사내가 박 화백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뼈마디만 앙상한 손가락으로 돌을 쥐고 희한한 손장난을 하며 어떤 지점에 돌을 놓을 듯 말 듯 바람을 잡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 사내는 되풀이되는 손동작에 짜증스런 얼굴로 반상을 내려다본다. 마침내 ‘딱’ 하는 소리를 내며 손바람을 잡고 있던 사내의 손이 반상 위에 떨어졌다. 그의 상대는 오랜 기다림에 짜증이 났던지라 생각 없이 뒤따라 곧바로 착점했다. 그 순간 돌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던 사내는 재빨리 돌을 한 칸 밑으로 밀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대마를 회돌이로 몰아 버리자 순식간에 바둑은 대역전이었다. 손바둑에 당한 사내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좆 같은 바둑이네!」 손으로 역전시킨 사내는 큰일을 성취한 사람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그때 대국실 문이 열리면서 60대 초로의 남자가 들어섰다. 잠시 기원 안을 둘러본 노인은 천천히 박 화백 쪽으로 다가왔다. 박 화백은 한눈에 그 노인이 원장인 것을 알았고 기원을 돌아본 이래 처음으로 실낱 같은 희망을 느꼈다. 저 노인 연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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