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커덕.

소장이 자신의 돌을 돌통 속에 던져 넣었다. 70여 수 만의 투석이었다.

「대단한 고수다. 그 실력 유감 없이 발휘해라.」

소장은 흡족한 얼굴로 평사를 칭찬했다. 끈질긴 장고파인 소장이 시간을 많이 소비한 탓으로 대국은 세 시간 가량 걸렸다. 소장이 바둑판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의무실에 있도록 해.」

평사는 묵묵히 판 위의 돌을 쓸어 담았다. 어쨌든 당분간 현장에서 죽음과 대치하는 위험은 사라진 것이다.

그날 밤, 평사는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몇 장의 옷가지를 챙기기 위해 숙사로 돌아갔다. 한 달 만에 보는 숙사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고 사람들의 시선도 뜨악했다.

그 사이 손씨의 모습은 한층 시들어 있었다.

「오랜만이군.」

힘든 하루의 일과 끝이라 손씨의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평사는 그간 있었던 일을 대략 손씨에게 설명했다.

「몸은 좀 어떤가?」

「견딜 만합니다.」

「운이 따라 주었어.」

손씨는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나도 바둑이나 배워 둘걸.」

평사가 자신의 소지품을 챙긴다.

「가야 하나?」

「예.」

하나 둘 들리던 코 고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비스듬히 몸을 누인 손씨의 음성에도 졸음이 가득 묻어 나온다.

「역시 자넨 내가 생각했던 대로 보통사람이 아니었어.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몰라도 자넨 이런 데 있을 친구가 아냐.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이 있어. 자네 사정은 모르겠네만 정말 잘됐어. 소장과 가까이 하다 보면 어떤 길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난 오랫동안 떠돌아다녔어. 탄광촌으로, 공사장 판으로 여기저기 안 다녀 본 데가 없었어. 집 떠난 지가 10년이 넘었으니……. 어떻게 한 밑천 잡으면 여편네 자식 기다리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마음은 늘 그랬었는데…… 늘 고향에…… 고향에…….」

어느새 손씨는 잠들어 있었다. 평사는 담요를 끌어올려 손씨를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연병장엔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평사는 어두워진 연병장을 가로질러 의무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디선가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간혹 그 여자, 화정이 꿈속에 나타났다.

꿈속의 그 여자는 언제나 슬픈 얼굴이었다. 여자는 갓난아이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아이는 어미의 젖을 빨다가 칭얼거리고 울었다. 여자는 아이를 달랜다. 아이는 여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계속 울었다. 여자가 다시 아이를 달랜다. 아이는 그래도 울었다.

여자…… 아이…… 여자…… 아이…….

그러다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눈을 뜨고 아이의 얼굴을 헤아려 보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써도 아이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슬픈 화정의 얼굴이 되살아난다.

의무실 생활은 편했다.

하루 종일 혼자 텅 빈 의무실을 지키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한두 명씩 입실해 오는 일본 군인도 있었다. 그런 일본 군인 중에 자신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부러 괴롭힌다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평사는 불안했다. 언제 어떻게 소장의 마음이 변해 자신을 다시 공사 현장으로 내몰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수용소 성격상 소장의 특별 배려가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남쪽 지방이긴 하지만 고지대인 이곳에 어젯밤엔 두껍게 서리가 내렸다. 의무실 한쪽을 둘러싸고 있는 철제 난간을 하얗게 뒤덮은 그 서리도 이제 햇빛이 들면 칙칙한 물기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겨울이 깊어 간다.

지난 1년간 평사는 흘러가는 세월만 바라보았다. 위수(渭水)에 빈 낚싯줄을 던져 놓고 세월 속에 묻힌 강태공처럼 시작도 결말도 없는 수를 반상 위에 놓으며 평사는 세월 속으로 그저 떠내려가고 있었다.

외상(外傷)에 대해 아는 건 아까징기(머큐로크롬)밖에 없고 속 아프다면 횟배 앓는 거라며 산토닌밖에 처방할 줄 모르는 부대에서 유일한 의무병이 누워 있는 평사를 깨웠다. 소장의 호출이었다.

무슨 일인지 이틀 동안 소장은 연락이 없었다. 의무병의 말로는 소장의 옛 친구가 산간 오지인 이곳까지 찾아와서 두 사람이 가까운 구마모토(能本) 시로 같이 나갔다고 했다.

소장과의 바둑은 1년째 석 점 바둑이었다.

처음 바둑을 둔 그 다음날 소장은 스스로 두 점을 놓았다. 그러고도 대패를 당한 소장은 고집스럽게 그 후 몇 번을 두 점으로 더 두었지만 아무래도 승부의 차이가 커 다시 석 점을 놓았다. 석 점 바둑에서 소장은 1년이 지나도록 치수상으로는 단 한 치의 진전도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부는 평사가 두세 집, 드물게는 열 집 가까이 이기기도 했지만 그런 정도의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게 소장의 생각이었다.

대국시 소장실 안에는 소장과 평사 단 두 사람밖에 없다. 어수선한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소장은 대국 도중에는 일체 보고를 하지 못하도록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바둑은 철저하게 침묵 속에서 두어졌다. 소장 입장에서는 비록 평사가 고수이긴 하지만 하잘것없는 징용자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그런 평사에게 소장이 주절주절 말을 건네며 친분을 쌓을 턱이 없었고 평사는 평사대로 소장에게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기억하기로는 최근 들어 소장이 한 말은 딱 한 마디, 그것도 혼잣말이었다.

「역시 석 점으로 무린가…….」

괜히 무리한 승부수를 띄워 서너 집 차이에 불과했던 바둑을 대마가 잡혀 불계패했을 때였다. 그런 소장의 자책은 최근에 들어서야 느끼게 된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분명히 1년 전의 자기와 비교하면 돌 한 점 이상의 실력이 늘었는데도 치수는 요지부동,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 데 대한 스스로의 의문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평사가 소장의 호출을 받고 소장실에 들어갔을 때 소장은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