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소장실 방문이 열렸다. 호소카와 소장은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며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차렷 자세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관 다나카(田中)였다. 그의 한 손엔 얇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었나?」

호소카와 소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사고 소식을 듣는 게 소장은 짜증스러웠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한쪽 다리와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그러게 안전사고를 유의하라고 했잖은가! 조금만 조심하면 몇 년 더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을 하찮은 부주의로 잃는다는 게 얼마나 큰 손실인가!」

소장의 엄한 문책에 부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누구야?」

부관은 가져온 서류를 건네 주며 소장에게 대답했다.

「제3숙사에 기거하는 추평사란 조선인입니다.」

건네받은 신상 기록을 주도면밀하게 훑어보던 소장이 다시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징용지에서만도 4년을 넘게 버텼다. 대단한 놈 아닌가.」

서류를 내려놓고 소장은 난로 위에서 하얀 수증기를 뿜어 올리며 끓고 있는 주전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많이 버티어 봐야 한계가 3년이라고 알려진 징용지에서 4년을 넘게 버티어 온 추평사에게 한순간 흥미가 일어났으나 그러나 그뿐이었다. 얼핏 생각해 보아도 4년 이상 징용지에서 굴렀다면 몸도 막바지에 온 게 분명했다. 4년 이상 버틴 그런 노련한 일꾼이 안전사고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점을 반영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산으로 갈 수밖에 없지.

「여기 탄원서도 있습니다.」

막 폐기처분의 명령을 내리려는 소장에게 부관이 또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탄원서?」

건성으로 탄원서를 받아 읽어 보던 소장은 몇 줄 읽기도 전에 신경이 곤두섰다.

탄원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나는 불령선인이 아니다. 나는 평생 바둑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 들어와 바둑을 둔 일밖에 없는 나를 불령선인으로 지목함은 심히 부당하다. 나를 풀어 달라.

탄원서의 내용은 대략 그러했다. 불령선인이고 부당이고 그런 것에 소장의 흥미가 끌린 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의 단어. 바둑, 그것이 소장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고(碁:바둑)라…….

탄원서를 내려놓고 소장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텅 빈 연병장에 산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이 누런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피할 곳도 없는 망루 위의 보초가 먼지 바람을 등지고 돌아선다. 소장은 뜨거운 물을 한 잔 가득 잔에 부었다.

고라…….

불현듯이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증조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 살이던가 네 살이던가. 그날 증조부는 어떤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판 위에 놓여지는 돌소리가 재미있어 장난 삼아 흐트러뜨린 일이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을 나무란 적이 없던 증조부는 처음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 서운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 울었던 그때의 기억만은 나이가 들도록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철 들면서 우연히 아버지에게 그 기억을 말했더니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네 증조부께서 일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이 있다면 그건 바둑이다. 어릴 때 처음 배운 바둑이 너무나 좋아서 바둑을 배우러 당시 기원 4가의 하나인 이노우에(井上)가에 단신으로 찾아가 바둑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더구나. 다행히 관장님의 눈에 들어 바둑을 배울 수 있었는데 평생 애는 쓰셨지만 4단에 그쳐 대성하진 못했다. 하지만 바둑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강해 이 아비도 어릴 적에 강제로 가르쳐 주는 바둑 때문에 곤혹을 치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 분이신 만큼 너를 혼낸 일은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탓인지 아버지의 바둑은 동년배 중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고 자신도 어지간한 자리에 가면 상석을 양보받을 정도로 고수 축에 끼였다.

「어떻게 할까요. 관례대로 폐기처분할까요?」

부관의 다그치는 물음에 소장은 잠시 젖어 들었던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났다.

「입실시켜.」

소장의 명령에 부관은 잠시 멍청히 서 있었다. 소장이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조차 읽을 수 없었다.

‘그런 버러지 같은 조선인을 입실 치료시키다니, 새로 부임한 소장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어. 뜻밖의 지시를 내려 사람을 당황하게 하질 않나, 의무실이 우리 군인들을 위해 있는 거지, 징용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부관은 치밀어 오는 부아를 잔뜩 삼키며 마뜩찮은 얼굴로 소장실을 나갔다.

소장은 뜨거운 물을 후후 불며 난데없이 그런 명령을 내린 자기 자신에게 실소를 보냈다. 원래 작정하고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바둑, 증조부, 이런 연상에 젖다 보니 자신도 의식치 못한 사이에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처해 놓고 보니 한편으로는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임해 온 지 한 달이 다 됐지만, 처음 보름간 이것저것 파악하고 나니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미리 지시만 내려 놓으면 부관이 다 알아서 처리하고 자신은 결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번 기회에 바둑이나 더 공부해 볼까…….

중앙의 고위 군간부로부터 이곳 철도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만 여기서 소장을 지내면 좀더 좋은 자리로 영전시켜 준다는 것을 내락받은 호소카와 유다까 중좌였다. 게다가 실적만 채워 주고 큰 사고만 없다면 상부의 간섭도 별로 받지 않는 한직이었다.

큐슈 섬 자체가 본토와 떨어져 있어 지리적 여건으로는 아무래도 문화와 사회 발전이 더딘 곳이기는 하지만 본토보다 따뜻한 기후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자식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동경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와 떨어져 있을 수 있어 자유스러웠다.

합리주의자인 소장은 대략 2년 가까이 추정되는 이곳의 재임 기간을 나름대로 의미 있는 데 투자하고 싶었다. 소장은 그 대상을 바둑으로 해도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에 발을 디딘 후로는 아쉽게도 거의 바둑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너는 평생 이 아비에게 두 점을 못 벗어나.’

호소카와 소장은 아버지의 그 말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바둑 후진국인 조선인 주제에 두어 봐야 얼마나 둘 수 있을까만 그의 탄원서대로 평생 바둑과 살아왔다면 어쩌면 아버지 수준을 능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 아는가. 동경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를 혼내 줄 수 있을지…….

소장은 빙긋이 웃으며 들고 있는 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