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봅시다.」

최 조장이 잠들어 있는 평사를 흔들어 깨웠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조장의 뒤를 따라 나가며 평사는 잔뜩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의문에 잠겼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 조장은 누구와도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런 밤늦은 시각에 자신을 불러내는 자체가 심상찮은 일이었다.

징용자 숙소는 이미 오래 전에 불이 꺼진 채 조용했지만 일본 군인들의 막사는 환하게 밝혀진 채 합창소리, 고함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탈주자를 잡아들인 공로를 치하해 소장이 그들에게 특별히 회식을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막상 평사를 불러낸 조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길로 일본군 막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막사엔 합창소리, 웃음소리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오늘은 아마 근무조 몇 명을 제외하곤 모두 술에 취해 있을 거요.」

한참 만에 입을 뗀 조장의 말에선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패를 손에 쥔 노련한 화투꾼 같은 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쩍번쩍 빛을 발한다.

「나는 오늘 이곳을 떠나오.」

「…….」

「죽은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 같은 날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소.」

결국 탈출이었다.

「탈출하고 싶거든 나와 같이 갑시다.」

순간적으로 평사는 강한 유혹을 받는다. 기회는 기회였다. 군인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경계도 보다 느슨해져 있을 것이었다.

「너댓 명이 며칠간 먹을 수 있는 식량도 준비해 두었소. 아껴 먹는다면 아마 열흘까지도 가능할 거요.」

「…….」

「빨리 결정하시오. 시간이 없소.」

「몇 명이요?」

침묵하던 평사가 말문을 열자 최 조장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나까지 네 명이오. 당신이 합세하면 다섯 명.」

「내게 이런 제의를 하는 이유가 뭐요?」

「이유는 없소. 이곳은 누구에게도 이유가 없는 곳이오.」

평사는 보다 더 강한 유혹을 받는다.

「성공할 가능성은?」

평사의 질문에 최 조장의 안면이 차갑게 굳었다. 평사는 조장의 눈이 분출 직전의 화산과 같다고 생각했다.

「반반이오.」

짧은 순간 평사는 격렬한 갈등에 휩싸인다. 조장 같은 성격은 함부로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반반이라…… 승부가 아닌가……. 이런 기회는 다시 못 올지도 모른다. 식량이 확보되어 있다면 아마 틀림없이 식수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 놓고 있으리라. 그리고 나름대로 도주로까지 세세히 계산해 놓았을 것이다.

어떡할 것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평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두겠소.」

평사의 거절에 조장은 예상했다는 듯이 조금도 놀란 빛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보일락말락 스쳐 지나갔다.

「그럴 줄 알았소.」

막상 거절해 놓고 보니 평사의 마음은 차라리 편안해졌다.

「사람들이 나더러 무서운 놈이라고 하지만 실상 당신이 더 무서운 사람이오.」

「…….」

「대신 내 부탁을 하나 들어 주시오.」

조장은 미리 준비한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실패하고 만약 당신이 살아 나가면 이 편지를 내 아내에게 전해 주시오.」

평사는 봉투를 건네 받았다. 어두워서 봉투 겉면의 주소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평사는 그 봉투를 품안 깊숙이 넣었다.

숙사 뒤에서 세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두 명의 얼굴은 생소했지만 그 중 한 명의 얼굴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7조 조장이었다. 최 조장이 그들과 손을 맞잡았다.

「가기 전에 한 가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

최 조장이 사내들에게 눈짓을 한다. 세 명의 사내가 고양이같이 날렵한 동작으로 숙사 안으로 미끄러진다.

잠시 후, 그들에 의해 끌려 나온 사람은 양이었다.

입이 수건으로 동여매진 채 양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양을 가운데 두고 그들은 빙 둘러섰다. 그 사이를 비집고 조장이 양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양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은 간절한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을 때가 있지.」

양의 얼굴에 일말의 희망이 보인다. 조장이 양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는다.

「……지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어.」

양이 창백하게 질린다.

조장이 일어나며 양의 목을 잡아 힘껏 비틀었다. 양은 아무런 저항 없이 컥컥대며 고통스러워한다.

팔에 힘을 주고 있는 조장의 얼굴은 침울했다. 조장은 팔에 힘을 더욱 가한다. 양이 강도가 세게 발버둥친다. 양의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연이어 우두둑, 듣기에도 섬뜩한 소리가 났다. 마침내 양의 목이 힘없이 건들거리며 아래로 처졌다.

조장은 목숨이 끊어진 양의 시신을 숙사 뒤 쓰레기통 안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잘 알겠지만 놈은 왜놈의 앞잡이였소.」

일을 끝낸 조장이 손을 툭툭 털었다.

「가 봐야겠소.」

조장이 평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평사의 가슴 밑바닥에서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다. 평사는 조장의 손을 잡았다.

「육손이에게 전해 주시오. 살리기 위해선 그 길밖에 없었다고…….」

조장은 평사를 바라보다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일행과 함께 숙사 뒤편 어둠 속으로 급히 사라졌다.

최 조장의 마지막 패착은 양이었다. 양의 시신을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날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가던 일본 군인의 눈에 우연히 양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 즉시 군대는 출동됐고 도주로는 차단되었다. 그들은 방향을 돌려 산으로 달아났으나 도주 닷새째 되던 날 최 조장과 그 일행은 전원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그들의 마지막 발악에 일본인 군인 세 명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나흘 후. 새 소장으로 부임한 호소카와 유다까(細川裕) 중좌가 임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