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으나 평사는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과연 살아서 다시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지옥 같은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더욱 자신을 깊은 절망 속으로 빠뜨린다.

‘희망이, 희망이 있을까.’

평사는 감았던 눈을 뜬다.

옆 자리의 손씨가 어느새 코를 곤다. 평사는 일어나 숙사 밖으로 나갔다. 자정이 지난 시각은 밤바람이 차가웠다. 머잖아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겨울이 되면 작업은 더욱 거칠어지고 죽어 나갈 사람은 배로 늘어날 것이다.

평사는 수용소 울타리를 쳐다본다. 철망으로 엮어 놓은 담장은 영원히 외부 세계와의 차단을 고하는 듯 어둠 속에 우뚝 치솟아 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최 조장이었다.

「담은 높아.」

「…….」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조장이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평사에게 한 개피 건넨다.

「피우겠나?」

평사가 거절했다. 조장이 머쓱해하며 담배를 다시 호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사람의 목숨은 끈질겨…… 누구도 몰라.」

담배를 한 모금 길게 허공에 대고 뿜어 내던 조장은 담배를 그대로 입에 문 채 숙사 안으로 사라졌다.

오후에 현장에서 또 한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근래 들어 이런 일이 더욱 다반사로 일어났다. 수용소에는 실적이 부진한 현재의 소장이 곧 경질될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작업 목표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갔고 안전 사고와 과로로 인해 숨지는 사람의 숫자는 점차 증가했다. 작업 자체가 난공사인 점을 감안하면 징용자들의 작업량은 초과 달성되고 있었으나 소장은 만족할 줄 몰랐고 애꿎은 징용자들의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다.

「사람 목숨이 모질다지만 허망하군.」

손씨가 한숨을 쉰다. 오후에 죽어 나간 사람은 평사와 같은 날 이곳으로 끌려온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건장한 사내였다. 웬만큼 건강한 사람들도 이곳에 들어오면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간다. 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보면 몸이 저절로 망가지는 것이었다.

평사의 몸도 시들 대로 시들어 있었다. 수용소에 끌려오기 전 술과 방탕한 생활로 이미 평사의 몸은 많이 망가져 있었다. 그나마 타고난 튼튼한 체질과 어릴 적부터 종살이를 하며 단련된 몸으로 지금까지 버티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사를 지탱시키는 건 여기서 죽을 수 없다는 강한 정신력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작업이 끝났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일본군들은 전 징용자들을 곧바로 연병장에 집결시켰다.

천 명이 넘는 징용자들은 영문도 모른채 운동장에 집결했다. 잠시 후 무장한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불빛을 받으며 사열대 위에 우뚝 선 소장의 당당한 체구와 그 불빛 사이로 길게 늘어선 중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이 전에 없이 엄숙했다.

소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너희들은 영광스런 대일본제국의 황국 신민이다. 너희들이 먹는 밥은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 내려 주신 은전이며, 너희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잠자리도 천황 폐하께서 내려 주신 성스러운 하사품이다.」

소장의 모자와 어깨 위에 달린 중좌 계급장이 불빛에 반짝인다.

「너희들은 그 은혜의 대가로 나라의 대동맥인 철도를 건설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천황 폐하의 은혜를 저버리고 몰래 이곳을 탈출하고자 기도하는 배은 망덕한 무리가 있어 오늘 그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비로소 징용자들은 왜 자신들이 이곳에 모이게 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이제 너희들은 보게 될 것이다. 황국 신민이 된 자로서 우리의 믿음을 저버린 배신자의 처참한 말로를. 따라서 너희들은 이와 같은 불경스러운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장이 연설을 마치고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내 눈을 가리고 입에 자갈을 물린 탈출자들을 군인들이 연병장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세 명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으나 들것에 실려 내팽개쳐진 한 명은 온몸이 군견에 물린 피투성이 시체였다.

「시행하라!」

부관의 입에서 짤막한 명령이 떨어졌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군인들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굵고 단단해 보이는 검은 쇠 파이프를 치켜들었다. 불빛 아래 꿈틀거리는, 그들의 등판에 아로새긴 문신 속의 용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살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징용자들의 공포가 극에 달할 때까지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던 군인들은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으며 더욱 힘껏 쇠파이프를 움켜잡았다.

「우―.」

그 중 한 명이 갑자기 괴성을 질렀고 그것을 신호로 그들은 탈출자들을 쇠파이프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얼굴이고, 머리고, 온몸을 가리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내리쳤다.

허연 뇌수가 튀어나오고 쇠뭉치에 뜯긴 살점들이 주위에 비산했다. 그들의 몸에서 튀기는 피가 군인들의 전신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살상을 시작한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개구리처럼 사지를 파닥거리더니 대자로 뻗어 버렸다. 그제서야 쇠파이프를 거둔 군인들은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로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대열 앞쪽에 서 있던 사람 중 일부가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너무나 처참한 광경에 사람들은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근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던 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덴노 헤이까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도열해 있던 군인들이 소장의 선창을 따라 만세를 불렀다.

「덴노 헤이까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군인들의 우렁찬 만세소리가 연병장에 메아리친다. 그들의 함성은 잠들어 있는 대지를 피로 일깨운다.

그야말로 피의 제전이었다.